더 이상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돼!
더 이상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돼!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후 남한에는 미국의 지원 아래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북한에는 구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 아래 공사주의 체제인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다.
당시의 남북 경제적 상황은 경공업과 사회 기반체계 면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좋은 환경조건이었다.
김일성은 남한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남조선로동당(이하 ‘남로당’)을 지원하여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고 남북을 공산주의 체제로 통일할 계획으로 이른바 여순반란사건과 대구반란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무장공비 소탕작전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계획하여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6.25전쟁이다.
그러나 6.25전쟁 역시 미국을 중심으로 UN 16개국이 지원함에 따라 북한은적화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 하게 되자 김일성은 ‘대남적화통일’을 목표로 3대혁명과제를 제시하게 된다. 즉, 북조선 혁명역량강화와 남조선 혁명역량강화 그리고 국제적 지원역량강화이다.
이를 위해 지난 60년 동안 북한이 추구한 전략적 접근법을 되짚어 보면
첫째, 북조선 혁명역량강화는 김일성 주체사상과 김정일의 선군정치가 대표적인 근간이 되어왔다.
둘째, 남조선 혁명역량강화를 위한 접근법은 통일전선전략전술이 핵심이다.
통일전선전략전술의 기본은 전략적 기만을 바탕으로 강온 양면전술을 추구하는 것으로, 지난 60년 역사상 남북이 합의문에 서명하여 발효시킨 합의문서 205건 중 196 건이 김대중(28), 노무현(168) 대통령이 집권하던 ‘90년대 말부터 ’00년 후반기까지 10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 기간이 얼마나 남북관계가 안정적이었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적 도발측면에서 다시 보면 ,80년 대 21건 이던 북한의 도발이 ‘90년대 42건으로 증가하더니 ’00년대에 이르러서는 72건으로 급증하게 된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가장 밀월의 남북관계를 유지했다는 기간에 북한은 가장 많은 군사적 도발을 자행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최근 발생한 천안함 사태를 보면 그 해답을 알 수 있다. 천안함 사태 발생 후 남한 내에서는 그 원인에 대해 아직까지도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한의 소행이라는 정부의 중간발표에 대해 무려 30%가까운 국민들이 신뢰하지 못한다는 여론조사결과가 발표되더니 그로부터 2개월 후에는 무려 70%가 신뢰하지 못하거나 뭔가 의심스럽다는 여론조사결과가 발표되었다.
사건의 본질을 외면한 채 겉으로 드러난 조금만 실수나 실언을 꼬리잡아 왜곡하는 현상으로 남한의 사회는 갈등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김정일 조차도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남조선 혁명역량강화라는 3대 혁명과제중 가장 중요한 하나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실현한듯한 느낌일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북풍이니 뭐니해서 북한의 도발은 곧 남한 사회의 대동단결 효과로 나타났는데 어느순간부터 북한의 도발은 곧 남한 사회의 분열과 남한 국민들의 전쟁공포감으로 몰아가는 효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국제적 지원역량강화를 위한 접근법의 핵심은 역시 핵무기 개발일 것이다. 북한은 늘 그랬듯이 보편 타당한 합리적 사고로는 협상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집단이기에 그들은 국제 무대에서도 그들만의 떼쓰는 방식으로 국제적 지원역량을 강화해왔다. 그러한 방법중 하나가 바로 핵무기 개발로써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된셈이다. 이제 북한은 미국을 위시한 세계 어느 열강과도 협상테이블에 마주앉을 것이다. 그러니 천안함 커녕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군사적 도발에 자유함을 갖게 된 것 아닌가?
핵이라는 반 강제적 지원역량과 남한 내에서의 동조세력, 군에 의한 철저한 통제체제를 기반으로 북한이 서북도서의 어느 섬 하나를 기습강점 후 정치적 협상을 제의해 온다면 우리 국민은 정부에 어떤 요구를 하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