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의 참전은 필요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옛날 반공 역사 교과서를 떠올리며,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야욕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군의 남침을 감행했다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겉에 치장된 역사적인 기록보다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인 진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당시 세계 최강인 미국이 과연 한국전쟁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었는지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한국전쟁이 일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미 국방성 자료에 따르면,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군 수뇌부까지도 한국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논의도 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오히려 수수방관했다.
그로 인하여, 남한은 북한의 적극적인 공세에 대구 이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지역을 북한군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남한의 군사력이 약했다는 말로써 이 역사적인 기록을 설명할 것인가? 아님 또다른 전쟁의 배후가 있다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세월은 거슬러 올라가, 1943년 모스크바 외상회의로 돌아간다. 1930년대 전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인하여, 전 세계의 경제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등은 블록 경제로써 위기를 극복했으나, 후발 경제국이던 일본과 이탈리아, 독일은 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군국주의와 파시즘이 생겨나게 되고, 전쟁을 통해서, 위기 극복을 할려고 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은 한때 프랑스 함락과 독일의 폭격으로 전 유럽이 독일의 수중하에 떨어질 위기에 처해져 있었다.
당시 영국의 처칠 수상은 다급한 나머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미국은 전통적인 먼로주의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허나 미국은 1941년 일본의 동남아 침공으로 인하여 필리핀이 위협받자, 경제 봉쇄에 나서게 되고, 이에 일본은 진주만을 습격했다. 이로써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미국의 참전으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측이 기세를 올리게 되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전쟁은 연합국측이 주도해나갔다. 파리가 수복되고, 1945년 5월에는 독일이 항복했으며,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은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하게 된다.
1943년 10월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당시 미국은 소련에게 태평양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허나 당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고, 1942년 8월~1943년 2월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와 같은 국운의 운명을 건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전선을 확대한다는 건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었고, 태평양 전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이 소련 영토에 진공해오는 것도 막을 길이 없었다. 당시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괜히 피해 보는 짓을 꺼렸다.
오히려 스탈린은 "그럴 폭격기가 있다면, 독일전선에 투입해달라"는 말로 미국의 요청을 거절했다. 당시 미국역시 소련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언제있을지 모르는 일본의 선제공격에 소련을 지원할 계획까지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일제의 선제공격에 의해 소련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원조계획을 세웠고, 1942년 4월 3일 합동참모부에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고, 1943년에 들어서 열린 3차 워싱턴 회담에도 같은 내용이 지시되었다.
알류산 열도 탈환 계획도 결국 소련을 원조한다는 발상에서 제기된 것으로써 소련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여러가지 군사 지원을 할 전진 기지가 필요해지는데 알류산 열도가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즉, 알류산 열도 계획은 일본이 소련을 침공한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렇듯, 소련은 독일의 공격에도 견디지 못할만큼 위급한 상황에서 굳이 전선을 확대해 자신의 명줄을 끊는 행위를 할 리가 없었다. 만약 소련이 참전하게 될 경우, 미국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 군사적인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1943년 10월 모스크바 외상 회담을 통해서,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당장 참여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었다. 스탈린의 제안에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라는 전제 조건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유럽 전선을 빨리 끝내야만 소련의 참전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 전선은 미국에게 호전되고 있었다. 1944년 6월 마리아나 군도를 점령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은 이미 미국의 승리로 기울고 있었다. 마리아나 군도는 일본 본토가 B-29의 출격권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일본 본토 폭격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필리핀의 상실은 일본에게 절대적인 타격을 가져오게 된다. 필리핀이 미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남방으로부터 오는 석유등 전략자원 수송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미군의 대만과 오키나와로의 진공도 시간문제가 되고, 본토 상륙도 단시일 내로 현실화된다.
따라서 만약 이게 가능해진다면, 일본 본토의 생존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일본 해군이 유명무실해져서, 대본영은 연합함대 전체를 투입해야 했다. 그 함대가 거의 괴멸당했기 때문에 그 후로 전투함대로서의 해군은 존재하지 않았고, 일본의 패망은 기정사실화된 셈이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내에서도 소련의 참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1944년 11월 24일 제출된 합동참모부의 보고서에도 외교정책에 대한 불만이 토로되어있었다. 레이히 제독이나 해군의 킹 제독, 니미츠 제독은 "우리가 소련에게 참전하도록 구걸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1944년 9월에는 일단의 육군 정보 요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들은 소련의 참전이 "세계를 뒤흔들만한 정치적인 사건" "다가올 10년간 악영향"식으로 반대했으며, 이미 유리한 상황에 간 미국이 소련에게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양보"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보고서에는 말미에 신랄한 문장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미 육군은 소련이 아시아의 전쟁에 개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미국 정보 요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이야,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을 끌어들여 후환을 남기는 일에 가만히 있을 수 리가 없었다.
1945년 4월이 되자, 합동참모부와 딘장군은 소련의 참전이 필수적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았고, 5월 12일에는 소련의 참전가치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은 모두 묵살되었다.
오히려 미국은 소련에게 독일전선에서 제공되엇던 만큼의 원조를 하겠다는 보장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소련은 한술 더떠서 극동지역의 상당한 이권을 보장해달라는 식의 요구를 내세웠다.
여기에는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반환, 여순과 대련을 포함한 요동반도 일부에 대한 조차, 만주 철도에 대한 권리 보장, 외몽고에 대한 기득권 보장등이었다. 미국은 막대한 물자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양보를 하게 된 셈인데, 따지고 보면, 미국은 소련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참전을 이끌어내는데 거의 비굴하다할 정도로 요청햇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다음 주에는 소련의 허약하다못해 한심한 참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세계 초강대국의 한심한 작전
"내 군생활동안 이런 작전은 실제 전뿐만 아니라, 도하연습에서도 해본 적이 없던 엉터리다."
한반도 진공 당시, 소련의 한 장군이 말한 회고는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역사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해주는 짤막한 한마디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만주와 한반도에 진군한 소련군의 규모는 대략 150만, 일본 관동군 100만을 소탕하기 위해 동원된 병력이라고 하지만, 사상 최악의 병력이 빈약한 무장을 한채, 한반도 진공을 했던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계획조차도 거의 세우지 않은 채, 왔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8일 0시에 작전을 수행했는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계획조차도 미루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던 것을 갑작스럽게 수행했으니, 당시 기록 그대로 하자면, "거지 부대"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지구에서 유일하게 남은 폐쇄국가인 북한을 우리 남한이 제대로 알리가 없다. 세계 최고의 정보 국가인 미국도 확실히 북한에 대해서 명확히 아는 것이 없다. 1945년 당시 지금까지 첩보 위성이 없던 시절, 과연 미국이 소련에 대해서 얼마나 알 수 있으려는지 모른다.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할때까지 소련군의 주력은 대부분 유럽전선에 있었다. 그러는 것을 3개월만에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실례로 걸프전 당시 미국은 24만을 걸프 지역으로 옮기는 데도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또 공격을 위해 추가 병력을 실어놓은 것만도 6개월이 더걸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당시 느긋하게 했을리가 없었다. 당시 이라크군이 사우디를 위협하고 있었는데, 사우디는 세계에서 석유가 가장 많은 나라인데, 사우디가 위협받을 경우, 세계 석유 파동이 재현될 가능성도 있었다.
따라서 지금의 최신식 수송 능력을 가진 미국이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면, 당시의 소련의 100만 대군을 모두 옮기는데만해도 1,2년 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소련이 극동에 150만 대군이 가졌고 알려졌을까?
첫째는 소련의 공식적인 발표이다. 소련의 제 25군 군사 회의 위원인 레베데프등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병력은 일본군의 2배이고, 포병에 있어서 4배, 전차와 자주포에 있어서 7배, 항공기에 있어서 2배, 전차와 자주포에 있어서 7배, 항공기에 있어서 2배였다고 한다. 다른 공식적인 문서에서도 소련군의 병력은 대략 150만이라고 밝히고 있으니, 소련의 공식적인 입장이었으므로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두번째는 소련의 진격 속도이다. 소련이 1945년 8월 8일 자정을 기해 작전을 실행하여, 8월 20일 경, 평양에 도착했다. 그러다보니, 병력이 엄청나게 막강한 부대가 일본 관동군 100만 대군을 괴멸시킨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사실은 일본 관동군이 괴멸된 것은 만주 내에 있던 조선인과 중국인의 게릴라 부대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항복로 인해 해이해진 탓도 있다.)
하지만, 1941년 독일에게 위협받던 당시 소련군의 주력은 대부분 유럽전선에 집결해 있었고, 연해주의 붉은 군대도 투입되어 있었다. 당시 소련군의 후방인 연해주를 지키는 것은 여군이었는데, 당시 관동군 제 1선 부대 장병들은 위문부대라고 부르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것이 1945년 5월까지 계속 유럽에 주둔해 있었고, 8월까지 주력군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한반도에 진군한 소련군이라는 건 여자, 어린애 심지어 감옥의 죄수까지 끌어모은 "거지부대"였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소련은 전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소련의 영토가 세계 최고로 크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것이다. 다 알겠지만, 공통적으로 각 나라의 표준시는 수도를 기준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모스크바의 시각으로 연해주의 군대보고 공격하라고 하니, 시간이 제대로 맞을 리 없었다. 당시 1945년 8월 8일 자정때 한참 폭우가 쏟아질때 그것도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세계 역사상 이런 어처구니 없는 전면전은 존재하지 않았고, 포병과 공군의 지원 없이, 오로지 해군과 육군만으로써 이루어진 상륙작전(?)이었다.
옹기나 나진, 청진 상륙 작전도 제대로 된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옹기나 나진에서 소총수 150명에 불과했고, 제일 큰 규모의 상륙 작전은 청진에서는 겨우 6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상륙작전이라는 것도 상륙정도 동원하지 않고, 부두에 배를 대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광경이 아니었다.
얼마나 형편이 없었으면 일본이 반격을 했을까? 이 반격으로 인해서 소련군은 쓸데없는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다. 한반도에서의 작전 목표는 단시일내에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북한 지역을 단시일내에 점령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이와 같이 볼품이 없었고, 오히려 쓸데없는 피해를 보아야 했다.
그러함에도 소련의 진격 속도가 빨랐던 것은 일본군의 저항 의지가 상실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이 나진, 옹진, 청진을 점령할 수 있엇던 것은 그들의 전력이 우위여서가 아니라, 저항이 약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미 저항을 포기한채, 철수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 참모 부장의 수기를 보면, 대부분의 관동군이 퇴각중에 전쟁이 끝났고, 만주지역에 있던 일본군은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철수했던 것이었다. 사실상 소련군은 무주공산의 도시들만 함락하면 끝나는 것이었다.
또한 전과 또한 과장되었다. 소련이 관동군에게 노획했던 무기또한 관동군이 소유하고 있던 무기보다 능가하고 있었다. 또한 소련의 진격 속도또한 과장되어있었다. 일본천황이 항복한 8월 15일때까지 만주의 반정도는 일본의 통제에 있었고, 소련군은 하얼빈이나 선양에 당도하지 못했고, 한반도에서도 북위 40도선까지만 진주한 상태였다.
소련 자신도 이런 처지를 절실히 절감하고 있었다. 스탈린 자신도 '일소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군이 캄차카와 동부 시베리아를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일본이 먼저 공격한다면 서전에서는 소련군이 패퇴할지도 모른다.' '소련이 일본을 공격한다는 말이 새어나가면 블라디보스토크를 상실할 수 있다'고 했다. 더구나 이 발언은 얄타회담때 였다.
얄타 회담은 2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패배가 확실시되가고 있는 일본군을 앞에 두고 회담에서 불이익한 발언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미국이 몰랐을 리 없다. 왜 미국은 굳이 소련을 참전시키려고 했을까?
"가장 위협적인 상대에게 골머리 않을 걱정거리 준다."
여태까지의 내용을 본다면 소련은 결코 미국에게 도움이 주지 못했고, 오히려 부담을 주었다. 하지만, 미국은 무리하면서까지 소련을 도와주었고, 그 댓가는 한반도의 분단과 6.25 전쟁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공산주의"인 소련을 도와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미국은 소련을 키워준 것인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까지 재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필자 주-굳이 이렇게까지 쓰는 이유는 1900년대 초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이후 루즈벨트로 부르겠다.)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2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스탈린의 협상에서 밀리고, 극동에 소련을 끌어들여 미국에게 불리한 사태를 초래했다고 한다.
왜 루즈벨트는 소련에게 무리할 정도로 양보했을까? 2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소련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에게 국력이 밀려 수도가 함락당할 위기까지 놓였다. 그렇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동유럽을 장악하고, 위성국가를 건설하여,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한다. 따지고 보면 소련이 거대해진 것은 미국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루즈벨트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외교에 치명타를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루즈벨트는 미국 역대 가장 긴 임기를 지낸 대통령이었으므로 정치에는 이는 도를 튼 사람이었을 게 뻔한 일이다. 아무리 건강이 나쁘다고 해도 미래의 적을 위해 미국의 국익을 통째로 넘길 만큼 무모한 사람은 아니다. 더구나 이런 시각은 루즈벨트 당시의 시각이 아닌 냉전이 시작된 이후의 시각이었으므로 결과론에 불과하다고 볼 수 없다.
현대사에 있어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냉전이라고 부르지만, 이런 말부터 미심쩍은 것이다. 강대국의 대립은 이미 유사 이래로 존재해왔던 것이고, 또한 그 대립의 이면에는 협조관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소련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영국 등에 있어서 대립과 협조라는 측면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냉전이라는 틀 아래서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해석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겉으로 대립해 보이는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그들은 예상외의 협조를 맺었고,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예가 그런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이후 동유럽은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소련블록이 형성되었다. 미국은 막기는 커녕 수수방관했고,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여 소련블록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거기에는 2차 세계 대전 와중에 유럽에 제 2전선을 형성하는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주 전장이 독 소 전선으로 넘어간 이후 소련은 미국과 영국으로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게 배후에 또다른 전선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고, 당연히 미국과 영국은 들어주어야 했다.
문제는 어디에다가 그것을 형성하느냐가 문제였는데, 소련은 프랑스 해안을 요구했다. 프랑스에 전선을 형성할 경우, 영미 연합군은 서부 전선에 배치된 독일군과 싸워가며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을 진격하게 된다. 베를린을 점령할 경우 전쟁은 사실상 끝난다. 그러나 작전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경우 영미는 동유럽에 신경쓸 수없고, 동쪽에서 진격해오는 소련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런 사태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우선 영국의 생명줄인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독일, 이탈리아 연합군을 축출한뒤,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이탈리아군대를 격멸하고, 발칸 반도로 진격하여 독일군에 필요한 석유의 75%를 공급하는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을 점령하면 독일군은 석유 공급에 차질빚게 되고, 독일군은 전력이 약화될 것이고, 이에 미영은 동쪽으로 독일을 공격하여 베를린을 함락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소련이 동유럽을 돌볼 틈이 없어지게 되는데,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했던 시점이 1943년 7월이었고, 소련은 1945년까지도 자기 국내에 있는 독일군과 싸워야 했다. 자기 영토도 수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남의 영토를 탐내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영미 연합군이 동유럽을 점령하는 것만 지켜볼 수 없는 처지였다.
결국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은 소련의 입장을 지지한 셈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상 최대의 작전" 이라고 불리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소재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감행된 것이었다. 이 작전은 영화 등에서 부풀려진 것과 달리 영미의 입장에서 볼때는 비효율적인 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플로에슈티 유전의 공격은 공중 폭격으로 대체되었는데, 이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파이프가 몇개 박혀 잇는 유전 자체가 공격대상이 될 수 없고, 정유 공장을 노려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정유 채굴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쓸데없이 공군력만 낭비하여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을 격퇴하는 시기만 늦춘 셈이었다.
죽써서 남좋은 일을 한 미국은 소련 블록에는 반대하지 않으면서 대영제국의 해체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잘 알려져 있듯, "인도주의"니 "민족자결"이니 실제로는 별 관심이 없는 명분을 내세우며 식민지를 독립시키라고 압력을 넣은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복구가 시급했던 영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미국의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대영제국은 해체되었다.
따라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이 몰락하고 소련이 부상한 것도 이런 조치에 의한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미국이 두려워했던 상대는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루스벨트의 전략은 결국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미국을 능가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를 제거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2차 세계 대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대영제국을 해체하는 동시에 보수적인 서유럽 제국에게 위협될만한 세력을 키워놓고, 두 세력 사이의 대립을 조성한 후에 주도권을 잡겠다는 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루즈벨트는 영국을 극도로 불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얄타회담때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영국을 배제한채, 미소 양국이 한국을 신탁통치하자는 제의까지 한 바 있다. 물론 스탈린은 "그렇게되면 처칠이 우리 둘을 죽이려고 할 것"이라며 우회적으로 거절할 정도였다.
결국 루즈벨트는 가장 위협적인 상대인 영국에게 골치를 썩여 줄 상대 한명을 덧붙여진 셈이 된다.
하지만, 극동같은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한반도의 분단은 더더욱 그러하다. 영국과 무관한대도 불구하고, 왜 우리 한반도는 분단되어야 했을까?
한반도 분단의 진실- 루즈벨트와 트루먼의 동상이몽"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급변한 미국의 대외정책
역사는 순환된다고 했다. 만약 과거와 현재 미래가 똑같은 공식으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만큼 따분한 일도 없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똑같다면 미래 또한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뫼비우스의 띠로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비슷하게 흘러가면서도 약간씩 틀리게 만드는 게 바로 역사의 공식이다.
만약 루즈벨트의 계획대로 한반도와 만주 문제를 소련에게 무조건적인 양보를 했다면 아마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루즈벨트의 돌연사로 인해 얄궂게 한반도 분단을 야기한다. 그 한반도 분단을 야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 뒤를 이은 트루먼 대통령이다..
루즈벨트 정권때 부통령으로 재직중이던 트루먼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급사하자, 권력 승계 원칙에 따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취임때 루즈벨트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했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곧 눈에 띈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 가장 관여된 부서인 국무성에 제임스 번즈라는 인물을 앉혔다. 국무성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불리던 인물을 앉혔으니, 그의 정책은 보수적으로밖에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보수란 즉 반공, 즉 그때 미국은 친소정책에서 반소로 바뀌게 된다.
트루먼은 당시 소련 문제에 대해서 여러 인사에게서 자문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한 인물이 에버럴 해리만 모스크바 주재 대사였다. 해리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주었던 자문이 "소련이 미국을 무서워하고 있으니, 밀어붙이면 우리 요구가 관철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에 트루먼은 곧바로 실행을 옮겼으니, 미국에 찾아온 소련 외상 몰로토프에게 폴란드 문제 같은 현안을 거론하며 소련이 약속을 어겼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당연히 화가 난 몰로토프는 곧바로 당장 항의하고, 당국에 보고했다. 당연히 소련 정부도 이에 대해서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 사실을 안 미국 언론은 "경험없는 풋내기 대통령이 철없이 굴다가 실수를 했다"는 식의 비난을 했다.
이와 같은 곤욕을 치루었던 트루먼은 그뒤부터 약간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참전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를 루즈벨트때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는 척 했다. 따라서 트루먼이 회고록을 집필했던 당시에는 이런 상황마저도 언급할 수 없었고, 그냥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치부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번 혼났다고 해서, 이대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국가 정책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트루먼 집권 이후 막후에서 외교정책은 바뀌었고, 소련에 대한 트루먼의 태도도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소련에서만 그친 게 아니라, 세계 전략 자체마저 바뀌었으며 그 덕분에 한국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고, 미국의 대소정책 변화의 방향은 분할점령 이전부터 바뀌게 된 것이었다.
38선의 진실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중에 하나가 38선의 분단이다. 왜 38선은 그어졌게 되었는가?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그냥 단순하다. 미국이 소련에게 38선을 경계로 양군의 주둔 경계로 삼자고 제안하고 소련은 이것을 수용했다. 이 단순해 보이는 사건은 그동안 수많은 시비를 일으켰다.
우리의 현대사는 38선을 그어짐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38선이 그어진 배경을 보는 시각에 따라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하는 기본 방향이 틀려진다. 일단 이문제에 대해 미국의 의도가 중요하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그다지 활약을 하지 못한 소련과 달리 극동의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서 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실제로도 극동의 전후 처리에 대해서 미국이 거의 모든 제의를 내놓고, 소련은 미국측의 제안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분할 점령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과의 거의 마찰을 빚지 않았다.
더구나 소련은 표트르 대제 이후 유럽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펴왔고, 공산주의 소련또한 그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더구나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그다지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극동지역의 이권은 미국덕분에 얻는 불로소득인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굳이 미국과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고 전쟁 중 회담에서 분할 점령까지의 한반도 정책에 관해 소련보다 미국의 의도에 비중을 두는 것은 미국이 38선 문제를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38선을 긋는 배경에 대해서 초창기 공개된 미국측 자료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급작스러운 소련군 진주에 대비해 미국측이 갑작스럽게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인식에서는 38선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생겨났다고 보았다. 미국이 한반도의 사정에 어두워 서울에 진주할때까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급하게 세운 비극의 씨앗을 잉태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최근 미국측의 자료가 공개됨에 따라 38선의 배경은 전혀 다른 측면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새로 입수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이 한국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학설인 "미국이 한반도 사정에 어두웠다"는 주장은 틀린 셈이 된 것이다.
수 많은 논쟁이 있지만, 드러나는 자료마다 서로 모순점이 있어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수수께기로 남아있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상황은 다음과 같다.
38선을 제시한 당사자인 딘 러스크등의 회고와 증언에 의하면 일본이 갑작스럽게 항복하자 8월 10일부터 15일까지 긴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의제는 일본 항복의 수락에 관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항복 접수 지역에 간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러자 존 매클로이 차관보는 10일과 11일 밤,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대령을 펜타곤의 매클로이 사무실 옆방으로 따로 불러 미군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북상하여 항복을 받을 수 있는 선을 작성해보았다.
그들이 지도를 대충 훑어보고 결정한 것이 북위 38도선이었다. 당시 국방부 작전 국장인 조지 링컨 준장은 원래 북위 40도선을 생각했으나, 그들의 보고를 받고 38선에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소련군이 이미 한반도 동북부로 진격하고 잇음에 반해 한반도에서 600마일 떨어진 오키나와의 미군 부대를 한반도에 진격해도 소련군의 속도를 따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미군의 일본 본토와 한국 진주 계획의 암호명인 "블랙리스트"자체가 1945년 6월에 검토되었고, 처음 빠져있던 한반도 진주 계획이 8월에야 나타났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제 10군 사령부에 한국 점령을 위한 부대 명단이 처음 올라온 것이 8월 11일이 되어서였다. 이렇듯 미군의 진주 계획은 졸속으로 추딘되었고, 분할 점령의 결정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가 대단히 급박하고 혼란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은 미국 국립 문서 보관서의 Record Group 226(Record of the 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서 발견된 많은 면접 자료들은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에 걸쳐서 미국이 한국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특히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한 갖고 있는 태도나 미국이 한국을 점령했을 경우 예상되는 한국의 반응등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 자료에 대해서는 덧붙임에서 언급하겠다.)
이와 같은 자료들로 봤을때 미국이 한국의 사정을 잘 몰랐고, 특별한 정책을 가지고 잇지 않았음 식의 주장은 허구로 들어낸 셈이다.
그러나 분단을 결정한 8월 10일 전후에 미국이 소련에 비해 군대의 주둔에 있어서 불리했다고 알려진 것도 의심의 대상이다. 소련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격할 계획이 없었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이후에도 군사작전은 그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반도의 진격은 만주 작전에 대한 측면 지원 차원에 불과했다.
소련군의 진격 능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분할 점령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소련군은 청진을 제외하고는 한국과 상당히 떨어져있었고, 한국에 진주한 소련군의 총수는 3천명도 채 되지 못했다. 또한 한국의 지형상 소련군은 한국의 동부 해안에서 서쪽으로 진주하기가 어려웠다. 서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니시와키 장군의 나남사단이 막고 있었고, 소련군은 이 사단이 일본 천황의 항복 통고를 받고 저항을 중지할때까지 진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반면, 전황은 미국에게 유리했다. 미 해군은 일본 전역을 사정권으로 두었고, 한반도는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의 항복은 사실상 8월 10일 발표된 것이고, 소련이 웅기와 나진에 상륙한 것이 8월 11일 저녁에서 12일, 청진에 상륙한 것은 13일이었으므로 38선을 결정했던 10일 당시 소련군의 진주 속도때문에 분단을 결정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소련은 한반도와 국경이 접해있고, 미군은 한반도에서 600마일이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다는 것인데, 그 거리는 허구에 불과하다. 600마일이라고 해도 한반도와 오키나와 사이는 바다이고, 항공기로 운송하면 몇시간이면 당도할 수 잇는 것이다. 하다 못해 수송선단만 조직해도 육지로 이동하는 것보다 선박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빠를 수 잇다. 육상으로 이동하려면 대병력이 잠시 쉬지 않고 이동하는 것이 곤란하지만, 해상에서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리상의 문제라기보다 미소 간의 밀약이 존재했음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밀약이 있었으며 군사작전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밀약설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간과했던 사실중 하나가 한반도 처리에 있어서 열강들이 공동관리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대해 사전에 연구했다고 하지만 이 내용은 어디까지나 공동관리를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로 발견되는 비밀문서까지도 일관되게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어 모두 조작일 수는 없다.
물론 공개된 공식문서들중에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관한 자료로 인용되는 미 국무성 간행인 FRUS같은 시리즈는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미국 정부가 내세우는 자료의 공개기준이 엄격해 이 FRUS에 대한 신뢰도가 높을 수 없다고 한다. 즉 미국 정부가 내세우는 기준때문에 빠진 사실이 많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FRUS가 빠진 사실을 많다는 것뿐이지, 이 자료가 왜곡 날조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FRUS뿐만 아니라, 모문서인 SWNCC 문서를 비롯해 다른 계통의 기록에서도 한반도를 공동관리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이상, 이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38선이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밀약했다는 주장이 엇갈리게 되니, 진실은 무엇일까?
맥아더는 왜 소련군의 참전을 주장했는가?
맥아더하면 우리는 딱 생각나는 것은 인천상륙작전일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와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교할 만한 거대 규모의 작전계획이었고,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급변하여, 유엔군이 전쟁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 다르겠지만, 인천상륙작전이 겉으로 보기에는 위대한 작전같이 보이지만, 사실, 인천상륙작전은 거의 도박과 같았다. 더구나 인천상륙작전은 북한의 인민군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나, 전력상의 문제로 못했다.(나중에 "인천상륙작전의 허와 실"에서 다룰 예정이다.")
하지만, 맥아더가 소련군의 참전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여러분은 놀라지도 모른다. 왜 맥아더는 소련군의 참전을 주장했을까?
시간을 거슬러 1944년 6월로 올라간다. 미국은 마리아나 군도를 점령한 후, 일본 폭격을 위한 하나의 기지를 구축하게 된다. 전에 알아보았듯, 미국은 일본에 대한 효과적인 폭격을 위해 소련의 참여를 요구했고, 소련의 기지를 이용해서, 폭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리아나 군도 점령 이후, 필리핀까지 점령하게 되고, 이 와중에 일본 해군이 사실상 궤멸에 이르자, 미국의 기본 전략마저 검토해야 했다.
이에 따라 대륙쪽에서의 접근은 포기하고, 그 대안으로 태평양 방면에서 일본 본토에 접근해가자는 전략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일본의 기동함대가 전멸한 이후 효과를 크게 볼 수 있었던 "쾌속항모기동타격대" 전술과 마리아나 군도 점령, B-29 폭격기의 등장 등에 그 기반을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곧바로 채택되지 않았다. 1944년이 되자, 미국 작전국 전략부는 "봉쇄와 폭격"만으로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며, 이러한 전략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내세워 본토침공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항공대에서 반발이 심했는데, 이러한 갈등은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전략의 채택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났다. 갈등속에서 전략을 확정지어야 할 시기가 촉박해지자, 새로운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본토침공을 전제하에 봉쇄와 폭격으로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의 참전 문제도 이 두가지 전략의 효과를 좌우했다. 소련군이 참전할 경우 봉쇄와 폭격의 문제는 불필요한 문제였다. 앞서 말했듯, 이미 1944년 10월에 필리핀 전투의 승리로 일본에 대한 봉쇄는 소련의 참전과는 별개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리아나 군도를 비롯한 태평양 방면의 기지 점령으로 폭격 기지도 만들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소련군이 참전하면 봉쇄와 폭격 전략은 무의미했다.
반면, 본토침공은 사정이 달랐다. 본토침공 같은 경우, 미군 병력의 일본 본토 침공을 실행시킬려면, 일본군의 막대한 저항을 염두해두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희생를 감수해야 했다. 이 희생을 다소라도 줄이려면, 본토 방어에 투입되는 일본군의 전략을 가능한 한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만주와 한반도에 배치된 소련군이 일본군이 본토 방어로 투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즉, 소련군의 대륙에 배치된 일본군을 견제해줌으로써 본토에 배치된 일본군의 증강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본토침공" 전략이 채택되었다. 항간에 알려진 "봉쇄전략"보다 종전을 빨리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채택된 것인가? 본토침공을 실행하지 않아도, 침공계획이 전혀 없는 것보다 일단 준비하고보자는 요인이 작용했다. 쉽게 말해서, 본토에 상륙하지 않게 되도, 준비해두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점에서 본토 침공 계획이 준비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소련군의 참전 문제도 이러한 미군의 인식으로 인해 불필요한 문제가 되었다. 합동참모부도 소련의 참전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할 거라고 견해를 표명했다. 맥아더 또한 빠른 시일내에 상륙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소련이 참전할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 보다 빨리 전쟁을 끝내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미군에게 사실상 필요도 없는 소련군의 참전 문제가 시빗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 육군의 총수 격인 맥아더는 본토 상륙 작전을 요구했고, 해군의 레이히, 킹, 나미츠 제독, 항공대의 아놀드 장군은 "봉쇄와 폭격" 전략을 주장했다. 즉 육군은 "본토상륙작전", 해군과 공군은 "봉쇄작전"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은 "봉쇄와 폭격" 작전의 경우, 해군과 항공대가 작전의 주요부분을 맡아야 하지만, "본토상륙작전"의 경우, 육군이 주요한 임무를 맡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때, 소련의 참전 문제가 군사전략적인 차원에서만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략의 선택이 미국 내 관련 부서의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으로 이를 위해 대외관계와 전략 선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육해군의 경쟁의식은 내각에도 나타나, 국방장관과 해군장관은 회의에서 나타나 대통령의 면담에서만 보고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부서의 갈등은 대잠수함 작전같은 중요한 작전에서 펜타콘 사용문제, 스포츠와 같은 사소한 문제까지 드러나고 있었다. 태평양 작전의 야전사령관들 같은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서, 진주만 기습 속보같은 중요한 정보조차 육군이 해군측에 제공하지 않는 탓에 많은 피해를 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부작용때문에 국방장관은 각 부서를 통합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더구나 맥아더의 인물됨에 대해서 눈여겨 볼 필요성이 있다. 맥아더는 우리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정계 진출에 뜻을 품은 야심가였다. 실례로 대통령 예비선거까지 진출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야심가가 향후 정계 진출에 중요한 경력이 작용될 주일미군정의 책임자 자리를 놓치고 싶어할 이유가 없었다.
맥아더가 소련군의 참전에 이중성을 보였거나, 소련의 참전이 늦어자 단독으로 상륙을 감행하자는 모순된 태도는 결국은 자신을 위해 국가적인 전략을 이용했다는 차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맥아더가 상륙작전을 주장하면서 소련군의 참전을 주장한 것은 결국 본토상륙작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일뿐이었다. 실제로 상륙작전이 감행되면, 맥아더가 지휘책임에 나서게 되고, 니미츠(해군 제독)은 지원임무를 맡게 되어있었다. 결국 본토상륙작전이 성공하면, 그 주일미군정은 맥아더가 차지하게 되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말이다. 결국 이러한 전략으로 인해 미국은 소련이라는 골치아픈 파트너를 맞이하게 되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미국의 행동
1950년 마침내 한국전쟁이 터졌다. 1년전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극동방위선을 제외하면서까지도 미국은 마치 한반도와 인연을 끊은듯 발언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유엔군을 파견했고, 미군이 거의 대부분의 전쟁을 수행했다. 왜 미군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일까?
이러한 미국의 행동을 "갈팡질팡하다가 뒷통수 맞았다."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전쟁 전에 군대를 철수하고, 무기를 비롯한 군사원조를 제대로 해주지 않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물적,인적의 막대한 손해를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를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의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이 그렇게 허술한 나라이라면, 어떻게 20세기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이 자체부터 수수께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미국이 머리만 텅 빈 얼간이 국가였는가?
겉으로 나온 공식적인 문서에서만 본다면, 미국은 남한이 공산권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주둔군의 철수와 달리 군사적 경제적지원을 계속한다."는 공식적인 표명과 달리 남한의 군사력은 "경비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원조금액이 수천만 달러 수준에 머물렀고, 고가다 싶은 무기나 장비는 한국 정부의 거듭된 요청에도 아예 제공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몇천 달러에 불과한 원조또한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미의회에서 후에 청문회까지 열어 군사원조의 집행이 늦어진 것을 행정부에 따질 정도였다.
미국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들이 될 수 있는한 한국에게 지원해줄려고 했으나, 예산의 한계 때문에 해주지 못했다라고 표명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에 맞지 않는 얘기이다. 미군의 군사원조가 남한으로 하여금 외부의 침공에 스스로 방비할 정도 제공하는 것이라면 예산이 없더라도 최소한의 방어체계는 갖추게 해주었어야 했다. 그렇지만, 미국이 남한에 제공한 무기는 양적이나 질적인 문제를 떠나 애초부터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제공된 무기를 보자면 지상군의 무기는 개인화기나 휴대용 화기에 집중되어있고, 중화기는 105밀리 화포에 불과한데, 이것또한 숫자가 부족했다. 이런 화력으로 전면전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문제는 북한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는데도, 이에 맞설 대전차화기는 거의 갖추지 않았다. 현대전같은 경우, 적에게 짧은 시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려면 전선의 일부를 돌파하여 보급선을 차단하고 대규모 적군을 포위망에 가두어 섬멸해야 했다. 이러기 위해서는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전선을 돌파하면,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해도 전선을 무너뜨려 저항을 못하게 해줄 수 있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전차인데, 1차 세계대전때 지지한 소모전으로 전개된 까닭이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전선을 쉽게 돌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전선을 쉽게 돌파할 수 있는 전차의 중요성은 더할나위 없었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상전은 전차 중심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전쟁에서 전차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적의 돌파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이는 전선의 붕괴에 직결되고, 패배로 가는 길이었다. 전통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가진 우리나라로서는 적절한 대전차화기만 갖추었어도 그렇게까지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개전초기에 한국군이 그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는 바로 전차에 대해 대응할 만한 무기가 없었고, 반면 전차의 기동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중동부 전선에서는 비교적으로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다. 전쟁전에 38선을 경계로 수많은 충돌이 있었음에도 북한측이 전차를 동원하지 않는 것은 남한측이 전차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결국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한 무기체계로는 아무리 많은 무기를 제공했더라도 적의 침공을 막을 수 없었다는 건 아무 의기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 대전을 두번이나 치룬 미국이 그걸 몰랐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이중성
국군에게 미국이 제대로 지원안한 것은 단순히 비용이나 우선순위 문제로 볼수는 없다. 한국군에게 방어를 할 능력을 갖추주려고 했다면 양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다도 최소한의 방어능력을 갖추도록 했을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을 치루면서 엄청난 양의 무기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 상황이었으므로 상당량의 무기를 폐기해야 했다. 지상군 무기의 핵심인 전차나 대전차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폐기처분해야 할 무기를 제공하는 것은 어차피 비용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폐기비용을 절감하면서, 제공이라는 생색을 낼수 있었다.(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미군의 무기는 이미 생산이 중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알고 있던 상식중에 북한군의 무기가 최신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북한군이 사용하는 것은 2차 세계 대전 초에 나온 것이고, 한국전쟁때는 이미 한물 간 구형이었다. 단지 성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쓰인 것뿐이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미군이 과연 한국에게 최소한의 자위력을 갖추도록 했는지 의문이다. 제공된 물자만 보더라도 미국의 "신생 대한민국의 안정에 필수적인 자원을 계속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공식적인 표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미국은 한국이 독자적인 방어체계를 갖도록 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미국이 유럽에게 지원되는 것과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더구나 미국내에서도 한반도 무용론이 제기되었고, 이것이 정책에 반영되어 그 유명한 애치슨 방어선, 즉 극동방위선에서 남한과 대만이 제외되고, 곧 미군이 철수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상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인데,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미국의 태도는 180도 바뀌어 전쟁 발발 이틀만에 미 해, 공군에 38선 이남의 북한군 부대, 전차, 포병에 대한 공격을 포함한 한국군에 가능한 최대의 지원을 결정하고, 곧 맥아더 장군에게 훈령을 하달함으로써 사실상 적극 개입을 결정, 실행에 옮겼다. 지상군의 투입도 6월 30일 결정되어 스미스 부대같은 경우 주일 미군중 규슈에 주둔한 미 24 사단이 파견명령을 받고,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제 24 사단장인 딘 소장에게 내린 명령중 "대대장의 지휘하에 2개 소총 중대와 4.2 인치 박격포 2개 소대, 75밀리 무반동총 1개 소대로 지연임무를 수행할 부대를 편성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명령서로 스미스 특수부대가 구성되고, 7월 1일 11:00경 부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스미스 부대는 급히 오는 바람에 장비가 열악했고, 곧 패배하게 되었다. 여기서 볼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희생될 것이 뻔한 상황에 병력을 투입하는 일은 보통 확고한 결의 없이는 보기힘들다. 이 정도의 결의가 뚜렷한 전략조차 없었던 상태에서 하루 이틀만에 생기기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를 포기했다느니, 무가치, 무효용론은 일부 실무 차원의 견해일지는 몰라도 미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권력 핵심부의 의사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한국을 쉽게 포기하려 할 것도 아니었음은 물론 뚜렷한 정책방향이나 전략을 세웠다고 보기 어려울 뿐더러, 오히려 미국의 저의와 상반된 논리가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것을 방치했다는 의심까지 자아내게 하는데, 이러한 행동은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어차피 포기하지도 않았을 거였으면서도 남한을 외부의 위협에 노출시키고, 방어할만한 전력도 북한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서 경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미국도 전쟁을 원했다
여기서 모순된 점을 짓고 넘어간다면, 일단 그 하나는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그러함에도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 두가지 사실은 마치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미국이 실제로 취한 행동들이었다.
더구나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거의 방치해둔 것처럼 보이던 미국의 대한정책은 미국이 마치 기다렸다는 한반도 전쟁을 수행했다. 아무리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국가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미리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 상황에 미국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으며,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부터 알아보자.
흔히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을 너무 몰랐다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너무 평화모드에 젖어 설마 침략할까 하고 방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큰 전쟁을 두번이나 치루었고, 두 전쟁 모두 승리자에 있었다. 그런 나라가 그렇게 순진할 수 있을까하는 것은 유아적 발상일뿐이다.
단지 그렇게 빨리 쳐들어올지 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전쟁이란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법이다. 그래서 전쟁에 대비할 때는 항상 유사시를 가정하고 대비해야 한다. 이런 것도 모르다면 그건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같은 나라에서 그런 인물들이 득실거린다는 건가?
그러면 미국은 만약의 경우에 발생해도 남한이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인들이라고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도 못보는 눈뜬 소경이 아니라는 건 다음 자료에서 볼 수 있다.
주한미군군사 고문단은 한국군의 보급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1950년 6월 보고서에 따르면 전투부대에 대한 보급과 장비는 필요한의 최저한도에 그치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부품은 떨어지고, 한국군의 무기 15%, 수송 수단의 35%는 이미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수준의 보급과 장비로는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보름 이상을 지탱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분명했다. 6월 15일에는 한국이 중국과 똑같은 재난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보다 전이긴 하지만, 맥아더 또한 똑같은 의견이었다. 1949년 1월 19일 미육군성의 조언에 응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충동으로 인하여 남한 내부의 질서가 혼란한 상태하에서 자행될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가진 한국의 경비대를 설치하기엔 미국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미국측에서도 북한이 대규모 남침을 감행할 경우, 한국군이 방어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남한을 방어선에서 제외한 이후, 북한에게 경고조차 하지 않았다. 경고가 힘이 든 것도 아니고, 돈이 든 것도 아니다. 한반도를 포기할 생각도 아니었음에도 왜 이런 일에 인색했을까? 실제로 종전 이후 북한의 남침 도발이 여러번 있었으나, 미국의 강력한 경고로 남한은 전쟁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북한조차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을까? 낙동강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인민군 제 2군단의 작전참모인 이학구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으며, 참전했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듯,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할 의도가 아니었고, 그렇다면 미국이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 이전에 미국의 공식적인 전략이 무엇이건 간에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서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미군을 투입했다.
전쟁을 치루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특히 한국전쟁같은 전면전에서는 하루 평균 수억달러에서 수십억 달러가 필요하다. 걸프전쟁때는 다른 나라의 돈도 썼지만, 한국전쟁은 미국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실제로 미국은 조이상의 달러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 미군을 투입할 생각이었다면 동시에 막대한 자금을 들어가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남한에 대한 군사원조에 대해서 많으니 적으니 하지만, 그 단위는 천만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군사원조를 많이 해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편이 더 훨씬 이익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전쟁을 선택했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계획 자체가 미국도 전쟁을 원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왜 이런 전략을 택하게 되었는가?
전쟁의 발발과 풀리지 않는 의혹들
6.25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은 의혹을 품고 있던 것은 전쟁 바로 전날 해제된 "비상계엄령"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 전쟁 전날 해제되었고, 더구나 전쟁 일어나기 불과 몇 시간전에 파티까지 벌이고 있었다. 군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을 비롯한 육군 본부의 참모 장교는 물론 각급 부대 지휘관에 참모 학교 요원과 피교육자들이 모두 밤늦도록 술이 떡이 되게 마셨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는 휴가 나온 장병들로 넘쳐나있었으니,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줄 모른다. 하필 이때 전쟁이 일어날줄 누가 알았겠는가? 신이 아닌 이상 전쟁이 터질 걸 미리 알 수 없으므로 비상경계령도 해제하고, 그동안 휴가도 못가며 고생한 장병들을 하루쯤 쉬게 한게 잘못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의 징후가 눈에 뚜렷이 보이는데도 비상계엄령을 해제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38도선 인접 지역에 사는 북한측 민간인들이 4~8KM 정도 북쪽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이 대표적인 예이며 대규모 부대와 물자의 이동, 평소보다 활발해진 정찰 활동은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징후였다.
그런 징후를 남한에서 탐지못한 것은 아니었다. 국군측만 보더라도 6월 22~23일 입수된 첩보를 분석하여 적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여기에 국군 제 7사단으로부터 "인민군 군관으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아군측의 지형을 정찰하고 있다."는 보고까지 했으며, 24일 15:00에는 채병덕 총장을 위시한 주요간부들이 긴급 회합을 가져, 비상계엄령 해제 중지 및 휴가와 외출 중지등의 건의가 제안되었다.
결국 모든 건의는 거부되었고, "첩보대를 주요 지점에 파견해서 08:00까지 보고할 것."는 정도였고, 나머지는 술에 쩔어있었다. 그야말로 한심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고서도 동해안에 주둔하던 국군 8사단은 7월 2일 제천에 집결해서 인민군의 공격에 준비중인데, 갑자기 충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한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같은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장은 지시에 따라 충주로 이동을 게시했고, 인민군에 의해 지름길이 차단되었음을 알게 되자, 7월 5일 오후 3시에 선발대는 대구, 본대는 영천, 안동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없다는 통고를 받자, 제천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이미 제천은 인민군의 수중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사태를 단순히 무능한 지휘관의 탓으로만 돌리기는 힘들다. 아무리 무능한 지휘관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도를 지나친 실수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안보가 걸린 상황에서 이런 치명적인 실수에 대해서 지휘관들에 대해 국가는 그들을 관대했고,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직 CIA 요원인 하리마오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 직전에 벌어진 파티의 제안자는 다름아닌 미 군사고문단 직무 대리를 맡던 헨리 대령이라고 한다.
정보력에 관해서는 어떤 나라보다도 우수한 미국이 한국측이 알고 있는 내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미국은 그런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바로 전날 파티를 열었고, 국군 지휘관들에게 술을 먹였던 셈이었다.
8사단만 해도 아무리 실수라고 하지만, 전략상 요충지를 적에게 손쉽게 내준 지휘관에 대해서 너무도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은 어쩌면 배후의 누군가가 압력을 넣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천상륙작전의 진실
한국인에게 6.25 전쟁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인천상륙작전을 얘기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국전쟁이 끝난 50년 후에도 여전히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인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있고, 그 작전을 수행한 맥아더 장군은 아직도 한국인의 존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작전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단순히 작전의 성공에 가려 진실을 묻어버린 인천상륙작전, 그 진실을 알아보도록 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지금까지 돋보였던 이유는 수세에 물렸던 국군이 단 한번의 전투로 우위를 점하고 북진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서울과 불과 40KM도 안되었던 인천이지만 인천에 상륙하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천해안은 거대한 갯벌이 해안에서 약 3마일 정도 서쪽으로 뻗어있었는데 상륙 용주정이 건널려면 조수가 적어도 30피트 이상이어야 한다고 한다. 근데 인천에서 조수가 30피트 이상일때는 한달에 단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공격 일자와 시간 선정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상륙을 하려면 그 갯벌을 뚫고 항구에 이어지는 좁은 수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애로사항은 한둘이 아니다. 이런 수로를 이용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인데다가 지형이 험하고 요새화된 월미도로부터 감시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월미도부터 처리하면 기습의 효과가 없어진다.
그리고 상륙부대가 한꺼번에 상륙할 수 없었는데 1차로 상륙한 부대는 약 11시간동안 후속부대가 상륙할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 동안 먼저 상륙한 부대가 적에게 반격을 받는다면 고립되어 전멸될 위협이 있었다. 거기에 도시자체가 12피트의 방파제로 보호되고 있고, 인천이 부산과 너무 멀어 상륙부대와 미 8군의 작전이 제대로 연계되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했기에 지금까지 인상에 남는 작전이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만 뒤져본다면 이런 일반적인 인식에 동의할 수 없다. 일단 인천상륙작전은 인민군의 기록에 의하면 기습작전이 아니었다.
1950년 8월 29일자 인민군 884군 부대 제 5보대 대대전투명령을 보면 "적들은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덕적도, 용유도, 영흥도 일대에 함선을 입항 체류하고 잇는바 적들은 기회만 있으면 인천항의 기습상륙을 시도하고 있다"는 요지의 글이다.
인민군이 이미 2주전부터 유엔군의 작전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기습작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민군은 그런 유엔군의 작전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못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왜 막지 못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이미 인민군은 전력이 바닥나 있었고, 맥아더는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성공을 확신했다.
맥아더는 개전초기부터 상륙작전을 맘에 두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지 일주일뒤 맥아더는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계획을 고려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 지시에 따라 작전참모부장인 라이트 준장이 있는 합동전략기획및 작전단에 의해 "블루 하트"라는 암호명아래 전략이 연구되어있다.
이 전략의 개념은 남부전선에서 미 제 24,25사단이 정면에서 반격하고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여 적을 38선 이북으로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7월 4일 맥아더의 참석하에 극동군 사령부에서 가진 첫작전회의에서 상륙작전을 7월 22일로 정하고 해병 1연대와 주일 미 제1기병사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열이 무너진 국군과 전선에 투입된 미군만으로는 적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했고, 현전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 제 1기병사단을 전선에 투입해야 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상륙지점을 인천으로 정하고 상륙작전에 대해 계속 연구 검토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미 합동참모부는 맥아더의 무모한 작전을 당연히 반대했고, 사태가 급박해지자 인천상륙작전 실패시 재앙을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고, 자신의 명령서 사본을 들고 가는 부관에게 미군 육군 참모부에 서둘러서 가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리게 되었다.
이 명령에 충실한 사관은 작전 당일날에 되서야 미국에 도착했고, 작전이 실행되기 불과 몇시간전 합동참모부에 도착했다. 결국 합동참모부는 작전을 취소할 시간이 없었고, 맥아더는 작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모든 장애를 넘어섰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그 작전으로 인해 낙동강 전투를 힘겹게 치러야만 했다. 방어선에 투입되어야 했던 병력이 상륙작전에 빠지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워커장군은 최후방어선인 데이비슨 라인도 검토할 정도였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던 병력은 무려 7만명, 인민군의 전병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 병력이 무모한 상륙작전에 희생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진의 미스터리, 맥아더의 도박
인천상륙작전 직후, 서울을 점령한 국군과 유엔군은 곧바로 38선을 돌파했다. 이때 맥아더와 트루먼은 웨이크 섬에서 전략회의를 열었다. 이때 맥아더는 이 자리에서 "추수감사절까지 적의 저항을 끝낼 수 있다."면서 중국의 참전에 대해서 개입시기를 이미 놓쳤기 때문에 참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의 큰소리와는 달리 중국군은 참전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까지 내주어야할 만큼 비참한 퇴각을 해야 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중국군이 참전한 후에도 무모하게 몰아붙여 전선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그의 오판으로 전황을 그르치게 된 것이다.
맥아더는 왜 이런 '오판'을 했을까?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인 홍학지는 오판의 원인을 맥아더의 '오만'에서 찾는다. 일종의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이 일본에 있어도 중국군이 감히 압록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할 만큼 오만해졌다는 것이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기 시작한 것은 10월 19일이었고, 국군의 첫번째 전투가 있었던 날짜는 10월 25일이었다. 미군과도 11월 1일 교전이 있었다. 미군과 교전이 있기 전에는 중국군의 참전이 확인되지 않았다. 전선에 있던 워커 사령관은 국군에게만 나타난 적을 보고, 혹시 국군내부에서 무슨 문제가 잇는 것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군과의 교전을 통해 중국군의 참전이 확인되었고, 맥아더에게도 중국군이 계속해서 압록강을 건너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국군의 참전을 계속 부정하면서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면서 무모하게 대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이 공세는 결국 실패에 돌아갔고, 유엔군과 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만 했다.
이런 처참한 결과에는 맥아더의 전략적인 실책에 있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50년 10월 24일 내려진 명령이었다. 맥아더는 이날 미 제 8사령관과 미 제 10군단장에게 휘하의 전병력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선까지 진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 명령은 한반도, 만주 국경선을 향해 제한없는 총공격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 결과 누가 먼저 압록강이나 두만강에 도착하느냐에 초점이 맞쳐지고 부대간의 원활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전선에 균형이 무너져 커다란 약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편제상의 문제도 있었다. 서부전선의 제 1군단과 제 9군단은 워커 중장의 명령을 받았지만, 동부 전선의 제 10군단은 맥아더의 지시를 받았다. 명령계통이 별개인 각 부대끼리의 협조가 이루어질리 없었다.
이런 요인으로 병력이 분산되었고, 더구나 진격하기 쉬운 해안도로를 따라 동서 양 전선 사이에 80KM가 넘는 커다란 틈이 생겼다. 이 틈을 국군이 메어야했지만, 장비나 사기면에서 미군에 비해 열세인데가 전선이 돌출되었다.
중공군은 이런 약점을 알고, 국군부터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뒤 미군을 포위했다. 당연히 유엔군의 공격은 실패에 돌아갔고, 11월 30일자로 후퇴해야만 했다.
결국 중공군이 뛰어나서 유엔군을 후퇴시킨 것이 아니라, 맥아더의 무모한 도박이 결국 유엔군을 희생시킨 셈이었다.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아무리 대규모의 중공군이 들어왔다고 하지만, 화력으로 열세인 중공군이 유엔군을 이기기가 힘들었다. 남쪽으로 후퇴한 유엔군이 전열이 정비한 뒤 중국군은 유엔군의 전선을 붕괴시키지 못한 점에서 맥아더가 얼마나 무모했는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무모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에 대한 새로운 작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9월 27일자 훈령에서 유엔군의 38선의 돌파는 허용하되 인민군의 격멸이라는 군사목표를 정한뒤 중소와의 충돌을 피할 것을 지시했다.
이 훈령은 중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훈령이엇으므로 당연히 유엔군의 작전은 제한받았는데, 그 제한선은 서해안 선천에서 동해안 성진에 이르는 지점까지 유엔군이 북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훈령을 맥아더가 10월 24일자 명령으로 풀어버렸다. 이랬기에 미국 내에서는 맥아더의 명령이 9.27 훈령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논란이 생기게 되었다.
중국이 참전한 상황에서 맥아더에게는 단순한 논란이 아니었다. 이 10.24 명령에는 중국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장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군이 소부대로 보낸 것도 아니고 북진하는 유엔군을 격퇴시킬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왔다. 이제 미국이 그렇게 피할려고 한 중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대통령의 훈령을 어긴 맥아더의 지시때문이라는 책임론이 제기될 경우 맥아더는 이에 대해 할말이 없을 것이고, 맥아더 자신에게도 위기가 닥치기 때문이었다.
이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전쟁을 조기에 끝내는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북진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국경지역을 장악해버리면 사실상 전쟁을 끝나고 자신의 오판도 묻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맥아더는 중국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했을 리가 없었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진격을 늦추고 전선을 정비해야 하는데 이런 조치는 자신의 장담이 실수였음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을 끌면 그만큼 책임추궁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의도로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펼쳤지만, 실패로 끝나자, 맥아더는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단순히 한반도에 진격한 중공군은 물론 중국해안 봉쇄는 물론 중국 본토를 공격하자는 주장까지 하게 된 것이다.
통일을 바라는 대한민국 입장에서야 고마운 일일지는 몰라도 미국 입장에서는 "큰일날 소리"였다. 미국의 의도 자체가 한반도의 전쟁을 적당히 이용하여 미국의 국익을 챙기겠다는 것이지, 자신의 운명을 걸고 한판대결을 펼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결국 해임된 맥아더는 청문회에서 망신살이 뻗쳐지게 되엇는데, 청문회에 불려간 그는 한 의원으로부터 창피를 당해야만 했다.
기본적인 요지는 왜 훈령을 무시하고 유엔군이 북진 제한선을 넘게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맥아더는 이에 "중국군이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지금 상황에서 중국을 공격하면 소련까지 개입했을 가능성이나 확전의 가능성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대답했다.
결론은 "중국군의 참전에 오판한 장군이 어떻게 지금 상황에서 확전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을 할 수 잇는가?"라는 것이었다.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맥아더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쓸쓸히 퇴장했다. 중국 참전의 오판과 이를 감추려고 했던 조치들이 오히려 그의 불명예 퇴진을 재촉했고, 그런 속사정은 세월 속에 묻히고 맥아더의 명언만 남았다.
열강의 이익만 챙긴 휴전회담
전쟁이 일어나다가 서로가 더이상 전쟁이 싫어질때 그만하자고 합의하면 휴전이 된다. 휴전은 피차 더이상의 희생을 줄이자는 것이니 서로에게 좋은 일 같지만 막상 쉬운 일만은 아니다. 싸우다가 그만둘 바에야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게 낫기 때문에 기왕 시작한 전쟁을 흐지부지 끝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혹 역전이 될라치면 이번에는 공격을 당한 쪽에서 "올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갈대는 마음대로 못간다."며 물고늘어진다. 이래서 휴전이 성립되기는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이 성립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한국전쟁이 그 경우중 하나다. 이런 경우 대체적으로 두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양쪽이 서로 지칠대로 지쳐서 더이상 전쟁을 계속할 의지도 능력도 잃어버린 경우와 애초부터 적당한 선에서 전쟁을 끝내고 타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때이다. 한국전쟁은 아마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대체로 휴전은 불리한 쪽에서 시작한다. 한국전쟁처럼 역전에 역전이 거듭된 전재엥서는 휴전을 대하는 입장도 전황에 따라 바꾸기 마련이다. 전쟁이 시작하면서 휴전까지는 아니라도 전투 중지를 촉구하는 제의가 있었다. 1950년 6월 26일 유엔은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한다.
하지만, 어차피 이 결의는 명분 축적을 위한 제스처일뿐 실효가 있을리 없었다. 인민군 측도 이미 마음 먹고 시작한 전쟁을 유엔의 결의가 있다고 해서 철수할 리 만무했다.
그래도 휴전제의는 인민군 측에서 먼저 나왔다. 국군이 38선을 넘던 1950년 10월 1일 북진작전을 개시하자, 입장이 급해진 북한을 대신해 소련의 외상 비신스키가 한반도의 적대행위를 종식하자는 명분을 내세우며 유엔총회에 결의안을 제출했다.
1950년 12월에 가진 정전 3인 위원회의 휴전중재는 "자신들의 참여가 없는 유엔의 조치는 불법"는 입장을 취했다. 또 "분계선으로서의 38선은 유엔군의 불법 침입으로 영원히 무효되었다."면서 휴전에 조건을 걸었다. 그 조건은 "한국의 모든 외국군 철수, 타이완 해협과 타이완 지역에서의 미군 철수, 한국 문제의 한국민족에 의한 해결, 중국대표의 유엔참가와 장개석 정부의 유엔 탈퇴, 일본과의 평화협정 준비를 위한 4대 강국 외무장관 회의 소집"
하지만 이런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일 리 없었고, 중국 또한 미국이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지 자신들이 공세를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휴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여기까지의 휴전 제의는 불리한 쪽에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제기했고, 상대방은 사실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내세우며 거부하는 형태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조금 사정이 달라졌다.
1951년 1월 1일로 기하여 취한 중공군의 3차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유엔군의 전선이 정비되어 더이상 공세를 취해도 중국군이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젠 유엔군이 재반격에 나서서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수복하고, 3월말에는 38선 이남지방을 다시 확보했다.
이 무렵 미국내에서도 전쟁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자는 선에서 휴전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새로운 극동 정책이 입안되었다. 이 내용은 무력에 의한 통일을 시도해서도 안되며 38선 이상의 북진을 시도하지 않고 이 선에서의 휴전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고, 소련도 참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적어도 공산화되는 통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 기본계획이 수립되엇다고 파란이 없지는 않았다. 트루먼이 "원상회복을 하는 선에서 휴전을 고려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맥아더가 먼저 "공산군 지휘관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는 발표를 해버렸다.
이 발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야전 사령관이 미국의 국가 원수를 무시하고 자신이 휴전회담을 하겠다는 발표를 해버린 격이었다.
더구나 회담을 제의하면서 중국을 계속 조롱했다. 그의 제안에는 중국이 자존심을 상할 내용들이 많았다. "중국의 군사력이 과장되었다는 등, 군사적 약점이 노출되었다.는 등이었다.
이 발언은 중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회담을 하자고 해놓고 중국이 요구한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이런 제안을 해버렸으니 진전될리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 중국은 5차 공세를 감행하여 다시금 전선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하지만 엄청난 화력차에 5차 공세마저 무위로 돌아가고 맥아더마저 해임되자 휴전계획은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그후 휴전이 성사되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미국이 더이상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든 중소의 충돌을 피하고, 적당히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1951년 5월의 전황은 5월 15~16일 감행된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는 미군의 화력에 의해 분쇄되었고, 5월말에는 중국군의 공세로 인해 물러났던 지역을 다시 수복하고 38선까지 진격했다.5월말 극동군 사령관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군과 중국군이 현재 분명히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확인도 하기 전에 미국은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겠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사실상 전황을 유리해지더라도 북진해서 통일을 이루어질 생각은 없었다.
물론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련과 중국의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맥아더의 장담덕분이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소련과 중국이 개입하면 적당한 선에서 끝내겠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 예가 바로 트루먼이 내놓았던 9.27 훈령이었다.
미국은 이미 얻은 것은 얻은 상태였기에 만신창이가 된 한반도를 반쪽으로 된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겠다는 것이었다. 소련이나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련은 자신 진영이 전황에 유래해지면 미국이 내놓은 제안을 거부하다가도 자신이 불리해지며 눈치보다가 적당히 타협해버렸던 것이다.
중국또한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전쟁에 직접 개입해서 상당한 희생까지 치뤘기에 그 대가를 얻으려고 많은 애를 썼다. 한국전쟁을 참전한 댓가로 대만문제와 유엔 가입을 얻어내려고 했다. 자기들의 전력이 바닥나는 바람에 결국 이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내던져가면서까지 남을 돕는 행동은 기대하기 힘들다. 어찌보면 남의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경향은 국제사회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동족끼리 싸움을 일으켜 남좋은 일만 시켜준 당사자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
이승만을 제거하라
미국은 한국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 했다. 비록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두 대통령 모두 이승만 제거를 심각하고 고려했고, 언제나 그런 계획을 실시할 수도록 준비해놓았다.
미국보다 더 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을 미국은 왜 제거하려고 해을까? 그리고 왜 실행되지 못했는가?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했던 최초의 시도는 1952년 5월에서 7월 사이에 나타난다. 이때는 한국정치사의 오점중에 하나인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으로 상징되던 시기이다.
당시 이대통령은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헌법 아래에서는 재집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초대 대통령이라는 높은 인지도와 전쟁중이라는 국가비상사태하에서의 군통수권자라는 유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대다수 의원들로부터 비난과 외면을 자초했다.
게다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쳐들어올때 서울사수를 목청껏 외치더니 서울 시민들이 잠자는 사이에 한강철교를 폭파시켜고, 거창양민 학살 사건부터 국민방위군 착복 사건등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 그의 실정, 무능에 대한 야당정치인의 비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국회의 분위기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더이상 대통령에 당선되기 힘들다고 판단, 51년 말엽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그러자 이대통령은 1952년 5월 25일 0시에 기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영호남일대에 느닷없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야당들을 국제공산당과 관련있는 빨갱이로 조작하여 구속해버렸다.
이런 사태에 당시 한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미국과 유엔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거제포로 수용소 사건이나 세균전으로 곤욕을 받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이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유엔한국위원단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국회 탄압을 제지하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유엔한국위원단을 동원해도 소용없자, 주한미국대사를 이승만 정부에다가 미국의 위협을 전달해도 효과없자, 미국대사인 라이트너는 이승만을 보호감금해야한다는 적극개입책을 제시한다. 이것이 첫번째 계획이었다.
두번째는 군부를 이용한 제거였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어던 이종찬 장군은 이승만 정부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러면서 미국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를 중심으로 일부 휘하의 장교들이 반이승만 쿠테타를 모의한 것이다.
거기의 주동자는 이용문 장군이었고, 8년 후 쿠테타를 일으킬 박정희도 여기에 적극 개입했다.
그럼에도 해결조짐이 보이지 않자, 이승만과 이승만 측근을 제거하고, 유엔군 과도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해었다.
하지만 미국과 이승만의 최고 갈등기는 1953년 휴전을 앞두고 있던 6월이었다. 이승만은 휴전 결사 반대를 외쳤고, 미국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한미 공동 방위 조약 체결을 제시했다.
이승만은 좀더 극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18일 유엔군의 사전협의도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시켰다. 한반도의 조기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는 당연히 이에 분노를 느꼈고, 이승만 제거계획을 손질할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미국의 국무성 안의 간부들이 이에 반대했고, 미국은 이승만에게 미군철수라는 카드를 제시하며 협박했다. 결국 이승만은 휴전회담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게 되어 마침내 휴전은 체결된다.
그 이후에도 이승만은 북진을 주장하고, 미국과 사사건건히 충돌했다. 미국은 원조중단과 미군 철수로 이승만을 회유내지 협박했고, 그때마다 갈등은 무마되었으나 미국의 이승만 불신은 더욱 가중되었지만, 결국 이승만은 제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승만은 자타가 공인하는 친미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았을때 이승만보다 더 미국의 이익을 수행할 줄만한 인물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승만의 독재가 한국민에게 고통이 되었어도 미국의 국익에 지장만 없으면 묵인된다는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 50년을 맞이해 다시 한번 한미의 관계가 피를 맺은 우방인지 생각해봐야한다
미국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다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와 휴전 직후에 걸쳐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중공군 개입 이전인 전쟁 초기부터 정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휴전을 이르고 나서도 체제가 위협받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핵무기 사용 계획을 검토한 것이다.
대통령의 OK 사인만 떨어지면 언제 어느때나 투하할 수 있도록 전술핵무기의 확보, 발사 방법 개발, 표적 분석등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미국 시각 6월 25일 일요일 오후, 주말 휴가에서 급히 돌아온 트루먼 대통령 주재하에 긴급대책회의가 열려다.
이 자리에는 CIA, 국방성,국무성 등의 최고위 군사, 외교, 정보 관계자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이 날 주 내용은 한반도의 전쟁보다 중, 소의 개입 여부와 전쟁에 대한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맞춰졌다. 미국 수뇌부는 한국 전쟁이 중국과 소련으로까지 확전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그래서도 한반도의 어딘가에 선을 그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어떤 수단으로 선을 그어야할 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트루먼 대통령이 공군 전투기로 소련과 중국의 공군기지를 폭파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공군참모총장인 반덴버그가 이렇게 답했다.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 하지만 원자탄을 사용한다면 즉각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록에 나와있지 않다. 단지 한국에 지상군 파견, , 제 7함대의 분대를 일본에 급파하는 문제, 아울러 공군에게 극동에 있는 모든 소련 공군 기지를 파괴할 것을 지시한다.
이러한 결정은 중국과 소련과의 일전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결국 소련 공군 기지에 대한 핵투하 가능성도 포함하는 것이다.
미 지상군이 오산전투에 참여하던 1950년 7월 6일 미 국방부는 원폭 사용을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전선이 금강에 형성되던 7월 13~14일 공군, 육군 참모총장인 주일 미군 사령부를 방문, 맥아더 장군을 접견하며 핵무기 사용을 협의했다.
이때 맥아더는 한국의 사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을 상정하고 만주와 블라디보스크에 핵무기 투하를 제안했다.이 두 지역이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통로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인천 상륙작전과 낙동강 전투의 승리로 판세는 뒤집혔고, 전세가 유리해자 수면 밑으로 들어갔다가 10월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핵무기 사용는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점차 전황이 불리해지자 본국 정부에 대해 신의주를 비로한 압록강 접경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 폭격 허가를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국방부는 이런 제안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북반부에 걸쳐 폭격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중국과 소련의 전쟁 참여 빌미를 제공할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위태로워지자, 대통령의 입에서 직접 핵무기 사용 언급이 나오게 된다. 11월 30일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행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기자가 핵무기 사용도 검토하느냐는 질문에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으며 전쟁에 참여하는 야전 사령관에게도 사용권이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원자탄의 사용은 대통령만이 승인할 수 있었다. 이때문에 보좌관들이 진땀흘리며 해명해 겨우 진정되었지만, 그 발언의 파장은 온 세계를 긴장시켰다.
대만 문제로 미국과 신경전을 벌였던 영국은 트루먼의 실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영국은 홍콩의 안전을 위해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미국은 결사반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야전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원자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또한 같은 날 국무장관인 딘 러스크는 워싱턴 주재 벨기에 대사를 만나 한반도에서 미국은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하자, 벨기에 대사가 원자탄 사용도 가능하느냐고 묻자, 국방장관은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트루먼과 러스크의 발언은 영국 의회로 하여금 "1945년 노동당이 집권한 이래 대외 정책 문제에 대해 하원에서 행해진 토론중 가장 심각하고 불안에 차고 진지해던 논쟁"이란 평가된 미국의 핵무기 사용 문제로 한바탕 소동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약 100명의 노동당 의원들이 애들리 수상에게 보내는 편지에 어떠한 경우에도 핵무기 사용을 반대한다고 서명했고 여기에는 미국의 지지자였던 보수당원인 처칠 전 수상과 이튼도 있었다.
12월 초순에 이루어진 영국 수상과 미대통령과의 좌담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은 유럽 각국의 우려를 반영하며 핵무기 사용 발언이 사실이 아니길 채근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나중에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반드시 연합국들과 사전협의를 하겠다는 언질을 해야만 했다. 애들리 수상은 이 약속을 서면으로 확약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대통령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원자탄은 미국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었다.
트루먼도 가능하면 원자탄 사용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었으나 미국의 희생을 막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핵무기가 꼭 사용되어야 한다면 그것을 투하시킬 준비를 해야만 했다.
알려지지 않는 자료에 의하면 1951년 1월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과 연합군은 수많은 인명을 상실했고, 전력과 사기면에서도 최악의 상황이었따. 11월 30일 미군 수뇌부는 한국전쟁에서의 실패를 자인하고 철수를 고려했다.당시 상황에서는 북한에 있던 미군을 무사히 철수할 수 있을지도 불안할 정도였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연합군이 한반도를 포기했을 경우 남한 정부와 민간인들을 태평양의 외딴 섬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는데, 한반도에서 6000KM 떨어진 "사바이"와 "우폴라"라는 섬이었다. 이곳에는 원주민도 적었기에 약 328,000명 정도의 남한 사람들을 이주시킬 수 있었다. 만약 그것이 현실화되었다면 남한은 지금쯤은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 국토 회복의 기치를 높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1953년 5월 13일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가 열려다. 한국전쟁이 막바지 접어들 무렵, 연합군은 휴전이라는 카드를 뽑아들고 소련과 협상하려고 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어떻게든 휴전만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다루는 중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는데, 솔라리엄 프로젝트가 그것이었다. 솔라리엄 프로젝트란 휴전이 무산되어 한국전쟁이 장기화되면 한반도와 만주 및 중국 소련까지 직접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계획이었다.
결국 휴전회담을 성사되었고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될 가능성은 낮아졌다. 하지만 미국은 휴전회담 과정에서도 실제로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고, 중국과 공산측에 대해 휴전에 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으로서는 핵무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암시를 계속해서 주었다.
결국 핵무기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언젠가는 사용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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