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지검 공안부가...
울산 모대학 교수를 국가보안법상 이적행위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는 소설같은 시나리오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된 김일성의 저술 <세기와 더불어> 입니다.
저도 잘 모르는 책이라서 네이버에 검색해봤더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내용이 뜨네요.
말도 안되는 검찰의 주장에 대한 기사도 링크합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008#_=1343523060875&count=horizontal&id=twitter-widget-0&lang=ko&original_referer=http%3A%2F%2Fwww.mediatoday.co.kr%2Fnews%2FarticleView.html%3Fidxno%3D104008&size=m&text=%EB%AF%B8%EB%94%94%EC%96%B4%EC%98%A4%EB%8A%98%20%3A%20%EA%B9%80%EC%9D%BC%EC%84%B1%20%EC%B0%AC%EC%96%91%ED%95%98%EB%A9%B4%20A%2B%ED%95%99%EC%A0%90%3F%20%EA%B5%90%EC%88%98%20%EC%9D%B4%EC%95%BC%EA%B8%B0%20%EB%93%A4%EC%96%B4%EB%B3%B4%EB%8B%88&url=http%3A%2F%2Fwww.mediatoday.co.kr%2Fnews%2FarticleView.html%3Fidxno%3D10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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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2078&mobile&categoryId=1599
세기와 더불어
정의 ; 김일성의 회고록.
개설
이 책은 1992년 4월에 첫 권이 나온 후 1995년에 6권이 간행되었으며, 1996년부터 1998년 7월까지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이 7·8권으로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나왔다.
편찬/발간 경위
김일성은 1912년에 태어나 1994년에 82세에 사망했는데, 그의 회고록은 1992년, 즉 80세 때 처음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방대한 회고록을 구상하였으나 자기 일생의 3분의 1도 회고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처음 출판된 것은 1992년이고 그가 사망하기 전 1994년까지 5권이 출판되었다. 6권은 아마 그의 유고를 모아 그가 사망한 다음해인 1995년 4월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한에서 말하는 『계승본(繼承本)』이라는 책은 김일성 사망 2년 후인 1996년 그의 회고록 7권으로 출판되었고, 1998년 7월에는 8권이 출판되었다.
내용
제1권에는 1912년 4월 김일성이 출생했을 때부터 1930년 5월 길림감옥에서 출옥할 때까지의 어린시절이 회고되어 있다. 김일성은 자기 가족에 대하여,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어머니의 고충, 만주벌판에서의 생활들을 회상했다. 어렸을 때 다니던 화성의숙(華成義塾), 타도제국주의 동맹(ㅌ.ㄷ.), 육문중학(毓文中學) 시절에 알았던 중국인 선생 상월(尙越), 그 당시의 독립운동가들 이관린(李寬隣), 차광수, 안창호(安昌浩), 오동진(吳東振), 최동오(崔東旿) 등을 회상하고 있다.
제1권에서 새로이 밝혀진 사실은 김일성이 부모를 잃고 만주에서 학교를 다닐 때 손정도(孫貞道) 목사 집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기독교 목사인 손정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해군제독 손원일(孫元一)의 부친이다. 김일성은 자기 부친과 손정도가 친한 사이였으며, 자기 아버지 김형직(金亨稷)이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崇實中學)을 나왔고, 어머니 강반석(姜盤石)도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혔다.
제2권에는 1930년 5월 감옥에서 나와서부터 1933년 2월까지의 일을 자세히 회상하고 있다. 김일성은 1930년을 시련의 해라고 하고, 감옥에서 출옥하였을 때 손정도 목사가 얼마나 자기를 반겨주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의 차남 손원태(孫元泰; 재미 의사)를 북한에 초대하여 옛날 신세진 것을 조금이라도 갚으려 했다.
김일성은 자기 본명이 김성주(金成柱)이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자기보다 5년 선배인 시인 김혁(金爀)이 지은 「조선의 별」이라는 노래에 기인하며, 이 노래가 보급되자 신안툰에 있던 자기 친구들(차광수, 최창걸)이 자기를 ‘한별이’라고 불러준 데 기인했다고 한다. 그 후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이름을 김일성(金日成)으로 개명하였는데, 이것은 오가자에 자기 친구 변태우(邊太祐)와 최일천(崔日天)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하였다.
공식출판물에 김일성으로 적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31년 고유수에서 체포되어 20일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때부터라고 한다. 김일성이 그 후 만주에 있는 중국인들과 항일유격대운동을 하고 1932년 4월 25일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한다.
제3권은 그의 회고록 중 454페이지나 되는 가장 긴 이야기인데, 1933년 2월부터 1935년 2월까지 그의 항일유격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김일성은 그 당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한국 게릴라 지도자들과의 관계, 중국 구국군과 항일 빨치산 지도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국제공산당 파견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전투업적을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일본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김일성의 전투도 있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결전도 이야기하고 있다. 김일성은 1933년에 쟈피거우 전투가 있은 후 자신의 1년 동안 유격전 경험을 기준으로 『유격대동작』이라는 책을 써냈다고 한다. 물론 이 책자는 찾을 수 없고 북한에서도 다시 만들어지지 않았다.
제3권에서 밝힌 사연 중 김일성이 만주에 있는 반일 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1934년 3월에서 5월까지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일성은 이 조선인민혁명군과 중국인들과 함께 싸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만주에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었을 때 조선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의 제2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자료 외에 일본자료나 중국공산당 자료에는 이러한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한 동북항일연군의 총사령관은 중국공산당의 영웅 양징유(楊靖宇)이고, 제2군 군장도 중국인 왕더타이(王德泰)였다. 김일성은 이 당시 제2군 제6사의 사장으로 싸우고 있었다. 이 회고록에는 이러한 사실이 나와 있지 않다.
제4권은 김일성의 1935년 2월부터 1936년 5월까지 항일전투 기록이다. 중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싸우는 데서 생긴 인종차별 문제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세칭 ‘민생단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중국인들이 조선인 빨치산대원 중 일본인 간첩을 몇명 적발한 것을 기원으로 조선인 빨치산대원들을 숙청했던 사건이다. 이 책에는 김일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같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대황위회의(大荒威會議) 기록에는 김일성의 존재가 없다.
김일성은 1935년 6월 하순에 북만으로 가는데, 그 곳에서 당시 싸웠던 많은 빨치산 지도자를 회상한다. 김책(金策), 최용건(崔庸健), 강건(姜健), 허형식(許亨植), 이학만 등은 만주 북방에서 싸웠고, 김일성은 다시 남만으로 돌아왔다. 김일성은 자기와 함께 만주에서 싸웠고, 광복 후 북한에서 자기를 도와준 최현(崔賢)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적고 있다. 그리고 만주에서 김일성과 그의 부대를 많이 도와준 장울화(張蔚華)에 대해 회상했다. 김일성은 장울화의 아들과 딸을 중국에서 평양으로 초대하여 영접하고 그를 회상했다. 이때는 김일성의 만주항일무장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시기인데, 자신이 조국광복회를 조선 국내와 만주에 창설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조국광복회에 대하여는 많은 역사적 문헌들이 있고, 이 회의 본명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이며, 창설자와 조직망도 잘 조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조직에 김일성이 관여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제5권에는 김일성이 남만에서 일본인들과 싸웠던 이야기가 나온다. 시기적으로는 1936년 5월부터 1937년 3월까지인데, 김일성이 중국군 사령관 만순(萬順)과의 관계도 회고한 후 백두산 밀영에서 활동하던 일을 회고했다. 또한 여기에는 빨치산 여성대원들이 언급되는데, 후일 북한에서 중요한 정치인들의 부인들이 된다. 김정숙(金貞淑; 김일성의 처), 김철호(최현의 처), 김옥순(최광의 처) 등은 이때 다른 여성대원 허성숙, 최장숙, 황순덕 등과 함께 싸웠다.
김일성은 또 남만에서 활동하던 일을 감격적이었다고 회고하면서 리제순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표했다. 이제순은 장백현에 살던 사람으로, 김일성과 그의 부대에 봉사했던 사람이다. 리제순은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후 혜산진 사건 때 잡혀서 그의 동지 권영벽(權永悳), 이동걸, 지태환, 서인홍(徐仁弘) 등과 함께 사형당했지만 그의 처 최채련과 그의 형 이효순(李孝淳)은 해방 후 북한에 돌아와 살았다. 이효순은 1967년 갑산공작위원회 사건으로 숙청당할 때까지 북한 대남대책을 주도했다. 이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리제순에 대해 회고하는 것은 그 당시 남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김일성 부대 활동 때문에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때 또한 김일성이 우리말로 『삼일월간』이라는 책자를 만들어 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없다.
1936년 말부터 1937년 초에는 김일성 부대가 국내로 들어오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보천보 전투가 있기 전의 일이다. 김일성과 함께 싸우다 일본일들에게 잡혀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박달(朴達)에 대해서 김일성이 회고하고 있다. 박달은 후에 북한에서 허약한 몸으로 김일성을 섬기고 살았는데, 그는 사망하기 전『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라는 책을 남겼다.
김일성은 자신과 천도교와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은 자기가 항일운동에 유용하게 이용한 조국광복회와의 관련을 설명하면서 천도교를 민족종교라고 하고 박인진(朴寅鎭) 도정과의 관계도 설명한다. 끝으로 김일성은 자기들의 투쟁이 인민들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인민과의 유대성을 강조하면서 제5권을 마친다. 제5권은 김일성 사망 2개월 전인 1994년 5월에 발행되었다.
제6권은 김일성이 사망한 다음해인 1995년 2월에 출판되었다. 김일성이 쓴 유고를 모아 그가 사망한 후에 출판했다는 추정이 가능한데, 시기적으로는 1937년 3월부터 11월까지에 일어난 일을 김일성이 회고했던 것이다. 1937년은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보천보 전투가 있었던 해이다. 제6권은 이미 간행된 5책과는 달리 김일성의 회고가 아니라 그가 남긴 유고를 북한 사학자들이 가필해서 펴냈던 것이다. 전광(全光, 일명 吳成崙)이 변절한 사실, 김일(金一), 백학림(白鶴林), 최현(崔賢), 이을설(李乙雪), 전문섭(全文燮) 같이 북한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회상이 적혀있다. 5책까지는 생소했던 김일성의 별칭 김사령(金師令)도 나오고, 김일성과는 달리 북만에서 활동했던 김책이 김일성과 함께 “따바리잠”(한 장의 모포를 놓고 여럿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자는 것)을 잤다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특히 김일성이 김일을 회고하면서 그가 죽을 때 김정일을 잘 모시라는 말을 했다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이 자기의 빨치산 전투를 회상하는 책에서 아직 출생하지도 않은 김정일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6권의 중요성은 이러한 조작이 아니고 보천보 전투 회상에 있다. 이외에도 김주현과 최춘국 (崔春國)같은 사람들도 회상하고 혜산사건이 끝나는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이 사망한 2년 후 1996년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의 회고록 계승본인 제7권을 출판했다. 이 책을 편집한 사람들은 김일성이 회고록의 총괄적인 구성안과 구체적인 요강을 만들어 놓았고, 많은 유고들과 주요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풍부한 회상자료를 남겨 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계승본은 김일성의 글은 아니다.
제7권은 시기적으로 1937년 11월부터 1940년 3월까지 김일성의 만주에서 한 마지막 항일운동을 회고하고 있다. 1937년에는 김일성이 마당거우 밀영에 있었고 열하로 원정가는데 대해 이야기하고, 동북항일연군 총사령관 양징유를 만났던 것을 회고하고 있다. 또한 1938년 12월 초부터 1939년 3월 말까지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재정자에 이르는 ‘고난의 행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북한은 이 책이 나올 무렵 ‘고난의 행군’을 한다고 하였기에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오중흡 7연대에 대해 상세히 적어놓으면서 오중흡과 그의 형제들이 항일운동을 충실히 했다는 것을 여러 번 이야기했다. 오중흡의 아들은 조선인민군 육군대장을 지낸 오극렬(呉克烈)이다. 일본토벌대 마에다 부대(前田部隊)와 싸워 이긴 전투도 회상된다.
1998년에 출간된 계승본 제8권에서는 1940년 3월부터 1945년까지 김일성의 활동이 회고된다. 이때까지 북한학자들은 김일성이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서 소부대 활동을 하면서 일본인들과 싸우고 있었다고 우겨왔다. 그러나 사실은 1940년 3월 이후 동북항일연군이 일본토벌대 사령관 노조에 쇼도구(野副昌德) 소장에게 전멸 당하고 살아남은 빨치산들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들어갔다. 과거에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했으나 김일성 사망 후 북한학자들은 이 제8권에서 김일성이 러시아로 들어간 것을 인정하면서 보다 더 넓은 국제적 판도에서 군사정치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이고 김일성의 부인인 김정숙 동지에 대해서도 나와 있다. 후일 김정일은 친모 김정숙을 위해 어머니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에 동상과 박물관을 만들었다. 계승본 제8권에는 김일성이 쓰지 않아서 그런지 김정숙은 물론 김정일까지 찬양하는 글이 많이 나온다.
의의와 평가
회고록 1권에서 부터 8권까지에 담겨있는 김일성의 회고는 그의 출생한 때로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항일운동과 빨치산 활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광복 후부터 사망 전까지 김일성은 북한을 근 반세기나 다스렸는데, 집권기 정치이야기는 하나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을 이해하려면 김일성 자신의 이야기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명실상부한 회고록이라는 제목의 책은 쓰지 못하였다. 그는 회고록에 준하는 책인 『세기와 더불어』1권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원래 나는 회고록을 쓸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 여러 사람들이 … 회고록을 쓸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제는 김정일 조직비서가 나의 사업을 많이 대신해주어 어느 정도 짬을 얻게 되었다 … 그래서 시간이 있는 대로 한 두 줄씩 적어 놓게 되었다. 나는 나의 한 생이 결코 남달리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한 생이며 인민과 더불어 지나온 한 생이었다고 자부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이 책은 김일성이 시간 나는 대로 한 두 줄씩 적어놓은 책은 결코 아니다. 김일성은 1992년부터 1994년까지 2년 동안 5권의 회고록을 출판했다. 김일성은 1권이 출판된 1992년보다 훨씬 전부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이 회고록의 그 내용으로 보아 많은 학자들과 일꾼들이 동원되어 역사사실을 회고하는 김일성을 자료적으로 도와주었다. 1권에서 5권까지, 즉 보천보 전투 전까지의 기록이 김일성의 회고라고 볼 수 있으나, 6권은 그의 유고나 그의 남긴 담화를 중심으로 학자들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계승본(繼承本)』의 경우는 김일성이 쓰지 않았고 북한 학자들이 김일성의 혁명활동을 1940년 초반까지 매듭지어 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과거 『김일성선집(金日成選集)』이나 『김일성저작선집(金日成著作選集)』에 나오는 논문, 연설문, 보고문, 담화문, 명령, 편지 등과 같은 김일성의 글과는 달리 이 책은 김일성이 계획을 세워 쓴 책이다. 이 회고록의 1~6권은 1996년과 1997년에 『김일성저작집(金日成著作集)』 마지막 권들(45~50권)에 수록되기도 했다. 김일성이 처음부터 책으로 펴낸 것은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김일성의 회고록은 제5권으로 끝난다. 제6권에 있는 보천보 전투에 대한 김일성의 회고는 중요하다지만 이것은 이미 김일성이 쓴 글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7~8권 계승본은 물론 김일성의 글이 아니다. 1~6권까지는 책 겉 표지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속표지와 맨 뒤 판권에는 회고록이라는 말이 없다)로 나와 있으며 친필 사인이 있는데 비해, 7~8권은 『김일성동지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면서 친필사인이 없다. 그래서 저자를 김일성으로 명기하지도 않은 것이다. 김일성이 스스로 회고한 것은 태어난 1912년부터 보천보 전투 전해인 1936년까지 25년이다. 그가 82년을 살았으니 그의 일생의 일부분만 회고한 것이라 하겠다. 김일성이 47년(1948~1994)을 다스려 온 북한정치에 대하여는 아무 회고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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