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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공이산과 다트라스 만지 [2] - 홀로 바위산을 깨부수다

하나님 사랑 2012. 12. 15. 09:09

희망의 이웃/홀로 바위산을 깨부수다

 

20여 년간 정과 망치로 쪼아서 길을 낸

인도의 수드라 촌로 만지


<한겨레21 - 1999년 08월 26일 제272호>

 

 

                          

 

지독하게 검다. 기골이 장대한 것도 아니다. 낡아서 누렇게 변색된 흰 쿠르타(인도 전통의 긴 셔츠)를 입고 웅크린 그는 얼핏 보면 피그미족 노인네로 오해할 만한 그런 작은 체격이다. 그러나 길고 흰 눈썹이 성긴 소나무처럼 올올이 뻗친 눈두덩 아래로 꺼져 들어간 작은 두 눈은 만만치 않은 빛을 발하고 있다. 한줌밖에 안 되는 몸피이지만 매우 강하고 든든해 보인다.


아내의 죽음 이후!


다스라트 만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해서 전체 인구의 60%가 절대빈곤층인 비하르주의 시골마을 가흘로우르에 사는 수드라 계급의 촌로이다. 일자무식에 학교라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송곳 하나 꽂을 땅뙈기 한 뼘 없는 가난뱅이다. 평생 누군가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한 적이 없고 한 푼 적선해준 적도 없다. 배운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기에, 사회정의나 인권이라는 게 뭔지도 전혀 모른다.


이런 그를 세상에 알린 것은 ‘바깥세상을 향한 길’ 하나였다. 바위산을 뚫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을 닦은 것이다. 그가 사는 가흘로우르 마을은 광활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힌두스탄 평원에서 드물게도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여서 오랫동안 외부와 왕래가 쉽지 않았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읍내에 가려 해도 산을 돌아 88km를 걸어야만 했다. 다스라트 만지는 혼자서, 어린애 손목만한 정 하나와 어른 주먹만한 망치 하나로 20여 년 동안 마을을 둘러싼 바위산을 뚫어 길을 냄으로써 마을과 읍내를 연결했다.


만지가 평생을 살아온 가흘로우르 마을에는 전기시설이 없다. 당연히 텔레비전도 없고 자동차도 냉장고도 없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진흙으로 벽을 쌓고 짚과 종려나무 잎으로 문을 엮고 지붕을 올린다. 마을에 한대뿐인 물펌프는 잡화점 마당 안에 설치돼 있다. 잡화점에서는 질 나쁜 담배와 한두 종류의 비스킷, 그리고 향을 팔고 있다. 만지가 바깥세상과의 길을 열기 전, 이 가게는 마을 안의 ‘만물상’이었고, 반상회와 사교클럽의 장소였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조상대대로 농업에 종사해왔으며 그들의 후손도 농부가 되는 것 이외의 다른 삶은 거의 알지 못했다. 들에서의 노동과 가게 앞 공터에서 끼리끼리 모여 두런두런 나누던 잡담…. 언제인지도 모를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 다음 세대도 또 그 다음 세대도 그렇게 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만지가 길을 냄으로써 주민들의 삶과 미래는 달라졌다.


바위산을 뚫기 위해 만지가 처음 정을 손에 든 것은 1960년이었다. 당시 그는 20대 후반이었다. “아마 스물 몇 살쯤 먹었을 때인 것 같은데… 생년월일 같은 건 몰라. 누가 호적조사 하러 여기까지 오겠어. 출생신고 하러 가는 사람도 없고. 나중에 누가 1960년이라고 가르쳐주더만. 어쨌든 그때 애 엄마가 산에서 굴러 떨어졌지. 이마를 다쳤어.” 아내는 무섭게 피를 흘렸다. 그러나 치료할 약도 방법도 없었다. 병원엘 가자니 피흘리는 환자를 둘러메고 산을 에둘러갈 장사도, 일손도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 속에서 남을 위해 하루의 생업을 포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아내는 죽었다. 남은 건 일곱 살 아들과 세살배기 딸이었다. “눈물? 눈물도 안 나왔어. 그저, 길이 없어서 그랬다, 읍내로만 갔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만 들더구만. 장례를 어찌어찌 치르고 나선 정을 들고 바위를 쪼기 시작했지.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 된다는 그 생각 하나로 매달린 거지.” 그렇게 시작한 공사는 20년을 훌쩍 넘어 1982년에 가서야 끝났다. 완공된 길은 총길이 915m, 평균 너비 2.3m에 이르렀고, 최고 9m 깊이까지 바위를 파냈다.


이젠 다리에 도전한다

 

그 22년의 세월 동안 그는 그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욕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동전 한 푼, 밥 한술 보태주지도 않았다. 물론 정부로부터의 원조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건 내 일이었으니까. 도움 같은 건 생각도 안 했지. 낮에는 남의 집 논일 밭일 해주고 매일 저녁이면 두어 시간 정도 산을 뚫었어. 그땐 애들 뒤치다꺼리도 해야 했고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길 뚫는 일만 할 수는 없었지.” 힘들었다. 그러나 한 번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느 샌가 마치 무슨 업보처럼 정질은 그의 삶의 한 부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22년을 돌을 쪼고 길을 닦다 보니 그것도 하나의 수행이 됐는지 스스로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는 변해 있었다. 길을 완공하고 난 뒤 그는 생애 첫 순례의 길을 나섰다.


그가 만든 새 길은 마을에 또 하나의 잡화상이 들어서게 했고, 주민들에게는 자전거를 사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나선 순례의 길은 이제 그의 생활이 돼버렸다. 그래서 길이 완공된 뒤 정부에서 수여하겠다고 나선 상도, 비하르주에서 주겠다는 표창장과 상금도 모두 거부했다. “상을 왜 주는지 모르겠더군, 도통. 내 할 일을 한 거야 나는. 게다가 사지 육신 멀쩡한데 뭐 하러 돈(상금)을 얻어 쓰나. 이제껏 하루 벌어 하루 먹기에 불편한 것 없이 살았어. 더 가질 필요가 뭐가 있나.” 그렇게 어눌한 듯 띄엄띄엄 이어지는 그의 말 속에는 어느새 참된 구도자가 지닌 탈속의 경지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번거로움을 다 떠난 듯한 육십대가 넘은 이 노인도 인도 정부에 대해서는 언성을 높인다. “길 만들었다고 종이 나부랭이 주지 말고, 다른 동네에 길이나 하나 내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인도 정부는 정말 쓸모가 없어. 가난뱅이들을 위해서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거든. 인도에서는 힘든 일이 생기면 자기의 두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구.”


그래서 그가 새로 시작한 일이 ‘다리 놓기’이다. 가흘로우르 마을과 비즈르간즈 읍내 사이를 흐르는 아로푸르강을 가로지를 이 다리는 정부의 원조가 아닌 ‘허락’을 받고 시작했다. 아로푸르의 물이 불어나는 우기철에는 반경 31km 정도의 지역이 강물로 양분된다. 이 때문에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30km여를 돌아가야만 해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바위산을 뚫고 왔더니 강물이 앞을 가로막은 형국이다. 그러나 만지가 현재, 근처 마을 페트와에서 공사를 시작한 이 다리가 습지와 강, 그리고 자갈밭 위를 가로질러 부다가야(부처가 성도한 곳) 근처 파테푸르까지 놓이게 되면 모든 불편은 사라질 것이다. 다리가 완공되면 두 지역을 잇는 길은 6.5km의 직선도로로 변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새로운 다리가 그의 생애 안에 완공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과 망치만 필요했던 길 뚫기와는 달리, 건축재료를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를 ‘신’이라고 부르며 그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지금은 비가 퍼붓는 우기철이라 그는 일손을 놓고 있다. 대신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지낸다. 한참을 걷고 나선 남의 집 잡일로 배를 채우고 다시 걷다가 다른 구도자를 만나면 몇 마디 나누어도 가면서. 바위산이 가져다준 새로운 삶의 길을 그는 지금 이 순간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비하르 가흘로우르=정진아 통신원)

출처 : 예찬모임
글쓴이 : 곰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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