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전쟁 중인 1951년과 전쟁 직후인 1954년에 지방 행정조직이 민간인들의 피해를 조사해 직접 손으로 써서 보고한 것으로, 전쟁 와중에도 우리 정부의 행정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가 국가기록원 등에서 최근 발굴한 이 문서는 1951년 경기도 양평에서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아 6·25전쟁 중 강제 납북당한 피해자를 조사한 것과, 1954년 2월 인천시가 공공건축물 피해현황과 납북자 수 등 민간인 피해를 조사해 작성한 문서다. 인천시가 작성한 문서는 인명 피해 상황표, 일반 주택 피해 복구 상황표, 시·구·군·읍·면별 피해 복구 상황표, 초·중·고교, 경찰서·금융기관 등 공공기관 시설물 피해 및 복구 상황표 등의 서식이 정해져 있어 전국적으로 통일된 피해조사 서식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 중인 1951년 11월에 경기도 양평군에서 작성된 문서는 군청에서 각 읍·면별로 6·25사변으로 인한 납치 또는 행방불명자에 대한 조사를 지시해 각 읍·면으로부터 피해 상황을 보고받은 문건이다.
이 문서가 의미를 갖는 것은 그동안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와 《월간조선》이 발굴해 6·25전쟁납북인사 피해자 신고의 근거로 삼았던 1952년 대한민국 정부 작성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에 대한 신뢰성 문제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는 점이다.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에 적혀 있는 명단에 대해 일부에서는 작성한 시기가 전쟁 중이었음을 들어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조사 없이 임의로 작성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양평군청 문서에는…
양평군 옥천면장이 단기(檀紀) 4284년(1951년) 11월 26일 작성해 양평군수에게 보고한 문서 표지에는 ‘6·25사변으로 인한 사망, 납치 또는 행방불명자 등 조사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과 함께 ‘별지와 같이 조사 보고함’이라고 돼 있다. 강하면장이 보고한 날짜는 같은 해 같은 달 27일, 양서면장의 보고는 28일로 돼 있고 보고서 필체도 달라, 말단 행정조직인 면 공무원들이 각 면별로 직접 조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각 면의 보고를 통해 양평군은 사망, 납치, 행방불명, 의용군 징집 등의 항목별 통계를 내고 있는데 사망자는 347명, 납치자는 28명, 행방불명자는 23명, 의용군 징집은 201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는 또 ‘6·25사변으로 인한 사망, 납치, 행방불명자 등 조사표’를 개인별로 기록해 놓고 있기도 하다. 본적, 주소, 성명, 연령, 직위 또는 직업, 정당 관계, 납치·사망·행방불명·의용군 징집 연월일, 납치 등의 일자 및 장소, 가족에 미친 영향, 약력 등 개인 신상과 관련된 항목들을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예를 들어, 양평군 양평면 양근리에 살다가 납치당한 것으로 돼 있는 강재성씨의 납치 당시 나이는 48세, 직업은 ‘사법서사 대서업(代書業)’, 납치일은 ‘단기 4283년(1950년) 8월 10일’로 돼 있다. 납치 장소는 ‘자택에서 피신 중’으로 돼 있고, 정당 관계는 ‘국민회’, 가족에 미친 영향은 ‘생활난 중’, 약력에는 ‘중졸·재판소 서기 2년’으로 돼 있다.
1952년에 정부가 작성한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에 기록돼 있는 항목도 성명, 연령, 직업, 소속 및 직위, 납치 연월일, 납치 장소, 주소 등 양평군이 작성한 납치 등 민간인 피해자 조사표와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가 제목 그대로 납치자 명단에 관련된 부분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양평군이 작성한 문서는 납치 외에도 사망, 실종 등의 민간인 피해 상황이 망라돼 있다는 점이다.
전국에 걸쳐 납치자 명단을 기록한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에도 강재성씨의 이름이 나오는데 두 문건에 등장하는 강씨의 주소, 직업, 나이, 납치일 등은 거의 일치한다. 양평군이 6·25전쟁 중 납치로 기록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51년 말의 양평군과 같은 조사가 전국적으로 있었고, 이를 토대로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가 작성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천시가 경기도로 보고한 문서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이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에 전시된 납북자 사진 앞에서 전쟁 중 납북당한 인사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단기 4287년(1954) 2월 20일 인천시가 작성한 문서의 제목은 ‘6·25사변으로 인한 피해 및 복구상황 조사에 관한 건’이다. 이 문서는 인천시장이 당시 상급기관인 경기도 내무국장 앞으로 보내는 것으로 돼 있는데, 문서에는 경기도가 6·25사변으로 인한 피해 및 복구현황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단기 4286년(1953) 12월 29일에 내렸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조사가 인천시 자체조사가 아니라 상급기관 지시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하는 문서인 것이다.
문서 맨 앞면에는 ‘별지 서식(書式)에 의하여 조사 보고함’이라고 돼 있어 전국적으로 동일한 양식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음도 알 수 있다. 조사서식 1호는 ‘인명 피해 상황표’였고 2호는 ‘일반 주택 피해 및 복구 상황표’였다. 다음으로 ‘시·구·군·읍·면별 피해 상황’과 ‘초·중·고 등 각급 학교별 피해 상황 및 복구 상황표’, ‘경찰관서·세무서·금융기관별 피해 상황과 복구 현상표’가 이어졌다. 각종 공공단체의 공영건물 피해 및 복구상황과 일반 기업체를 공업·농림·수산 부문 등으로 나눠 피해 및 복구상황을 조사한 표도 있다.
인명 피해 상황표는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귀환자 등 6개 부문으로 나눈 다음 총계(總計)를 표시했는데, 분류 중 눈길을 끄는 것은 귀환자(歸還者) 부문이다. 전쟁 중 조사에서 있었던 의용군 징집 등의 항목이 빠지고 대신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귀환자 항목은 납치됐다가 귀환한 사람과 행방불명됐다가 귀환한 사람으로 나누어 표시했다. 조사가 종전 협정 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인명 피해 상황표에 기록돼 있는 인천시의 납치자 수는 남자가 1011명, 여자가 9명 등 총 1020명이다. 학살당한 사람도 남녀 합쳐 105명으로 기록돼 있다.
인천시가 작성해 경기도로 보고한 문서에는 인천시의 관할 하부 행정조직에서 보낸 보고서도 함께 편철돼 있다. 보고자가 서관(西串)출장소장으로 돼 있는 문서의 작성일은 인천시가 경기도로 보고하기 한 달 전인 단기 4287년 1월 21일 자로 돼 있다. 이 문서도 양평군청이 작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단 행정기관이 피해자를 일일이 조사한 결과를 취합해 상급기관에 보고했음을 알 수 있다.
서관출장소 관할 동 중에 백석동, 시천동, 검암동, 경서동 등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관출장소는 지금의 인천시 서구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으로 서관출장소 관내에서 학살, 부상, 행방불명 등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총 138명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전쟁 직후였던 당시 정부가 말단 행정기관까지 동원해 인명 피해 상황을 조사했지만 그 피해 숫자만 남아 있을 뿐 인적사항이 적힌 명부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은 “1952년 정부통계연감과 납치자 명부의 숫자가 일치하는 것을 볼 때 1953년 정부 통계연감에 나오는 8만4532라는 숫자와 일치하는 납치자 명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합리적 추론”이라면서 “정부가 6·25전쟁 전에 발생한 일제 위안부 할머니 피해 문제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6·25전쟁 중 납북자 문제에는 관심이 덜한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납북자 명단 찾을 의지 없는 정부
서울 광화문 원표공원에서 열린 ‘국군포로·납북자 이름 부르기’ 행사에 참석한 수전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가 납북자 문제 해결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정부는 1953년 통계연감에 나오는 8만4532명의 명단을 확보하는 일을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보고 있다.
과연 그럴까. 기자는 《월간조선》 2002년 2월호에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 발굴 기사를 보도한 적이 있다. 당시 납치자 명부 발굴기 중 일부를 그대로 인용한다.
< 통일부 관계자는 정부 내에 납북자 명단이 없다고 했지만 기자는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를 전화로 하루 만에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정부기관 안에서. 결국 통일부는 자료를 찾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로부터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를 입수한 기자는 지난 1월 2일 오전 문서 작성처가 공보처 통계국이었던 점에 착안, 공보처와 공보처 통계국 후신인 통계청에 6·25전쟁 납치자와 관련된 자료가 있는지 전화로 확인을 요청했다. 통계청 통계정보국자료관리과의 관계자는 잠시 후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료 검색 결과 통계청 전시관에 <6·25 피립(‘拉’ 자를 ‘립’으로 잘못 음독해 기록해 놓은 것으로 판단됨-편집자 주)치자 명부>가 전시돼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기자는 그 관계자에게 전시관에 있는 자료를 확인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날 오후 그 관계자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그 관계자는 “확인 결과 립은 랍의 오자(誤字)였고, 규장각이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를 해 온 문건으로 판단된다”고 확인해 주었다.
곧바로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확인한 결과 국립중앙도서관에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가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존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관계자는 “1996년에 하버드대 엔칭(YENCHING)도서관에서 마이크로 필름으로 영인(影印)해 온 문서”라고 밝혔다. 528쪽으로 이루어진 그 문서에는 6·25사변 납북자가 8만661명에 달한다는 사실과 함께 서울에 거주하던 1만8330명의 납북자 명단이 실려 있었다.
통일부가 노력을 해도 찾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던 납북자 명단이 하루 만에 발견된 것이다.>
납북자 명단을 직접 작성했던 공무원의 증언
서대문형무소에서 개최한 ‘제2회 6·25전쟁납북자 생사확인 촉구 납북길 따라 걷기’ 행사. |
6·25전쟁 당시의 납북자 명단을 찾기 위한 노력은 2000년 11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본격적으로 출범하면서부터다. 6·15남북정상회담 후 납북자 가족들이 전쟁 중에 납북된 가족들의 소식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단체가 출범한 것이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이었던 당시 기자는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발견 후 통일부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다음은 그때 그와 나눴던 문답이다.
—정부는 6·25 납북자 명단과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실향사민(失鄕私民) 명단 외에는.”
—1956년에 대한적십자사에서 납북자가족들의 신고를 받아서 작성한 실향사민 명단 외에는 없다는 말이죠? 주무 부서로서 행자부 등 다른 정부 기관에는 납북자 명단이 작성된 문건이 있는지 확인은 해보셨습니까.
“우리가 노력을 했고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서도 요구를 했지만 통계자료만 있고 실사자료가 없으니까 행자부에서 그걸 어떻게 해요. 생각을 해보세요. (있다면) 50년 전 전시(戰時)의 자료인데… 그 당시에는 자료 정리가 안 됐잖아요.”
—취재를 하다 보니까 6·25 납북자 가족들은 1952년도에 정부에서 납북자 명단을 작성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납북, 피살, 행방불명 이렇게 항목을 나눠서 조사해서 명단을 작성했다고 하던데요.
“내가 말씀드렸잖아요. 통계는 나와 있어요. 그 당시에 사망이 몇 명, 피랍이 몇 명, 실종이 몇 명 이런 식으로 당시 내무부에서 경찰에서 들어오는 이런 걸 통합해서 냈지 누가 납북자다, 누가 사망했다, 이런 게 없다는 겁니다.”
—통계로는 되어 있어도 일일이 개인별로 피해를 조사해 작성한 명단은 없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과연 그 공무원의 말대로 이승만 정부는 전쟁 상황이라 납북자 명단을 작성할 수 없었을까. 납북자 명단 발견 후 1년반쯤이 지난 2003년 7월 기자는 당시 공보처 통계국 소속 공무원으로 납북자 명단 작성에 참여했던 이원상(李元相)씨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기자와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84세였는데 현재는 작고했다. 이씨는 “명부를 어떻게 작성했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피란 당시 수도였던 부산의 경우는 우리가 직접 받았어요. 타 지방에서도 부산으로 직접 와서 신고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지방은 납치 일시, 장소, 직업 등을 적도록 한, 우리가 만든 양식을 행정계통을 통해 보내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납북자 가족들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납북자들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면서 눈물바다를 이뤘죠. 심지어 명부가 인쇄돼 나오자 혹시라도 신고한 가족의 이름이 빠져 있을까 봐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통계국 사무실이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어요.”
6·25 당시 납북자 명단을 작성한 담당 공무원이 생존해 있었다는 것은 정부가 납북자 명단을 찾을 의지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는 또다른 방증이기도 하다.
현 정부의 공무원들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더 이상 명단을 찾을 수 없지만 노력하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답변이다.
과거 정부나, 지금 정부나
현재 정부가 확보하고 있는 납북자 관련 명부는 《서울시 피해자 명부》(2439명, 공보처 통계국 작성),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8만2959명, 공보처 통계국 작성), 《6·25동란으로 인한 피랍치자 명부》(1만7940명, 내무부 치안국 작성),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7034명, 공보처 통계국 작성) 등이다. 이 가운데 정부가 애초부터 보관하고 있었던 것은 7034명의 명단이 적힌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뿐이다.
나머지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와 《월간조선》이 찾아냈거나 고서(古書) 소장가로부터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이 개인 돈을 들여 구입한 것뿐이다. 이번에 발굴된 인천시와 경기도 양평군의 문서도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찾아낸 것들이다. 6·25전쟁 중 납북자와 관련한 자료를 찾는 일에는 과거 정부나 현재의 정부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셈이다.
그나마 지난 2010년 6·25 납북 피해자법이 통과됐고 현재는 국무총리실 산하에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작은 위안거리다. 진상규명위원회는 6·25전쟁 당시 납북으로 인한 피해 신고를 받고 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올 연말까지 피해자 신고를 받을 계획이지만 9월 말 현재 피해 신고를 한 사람은 3500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사망한 가족들이 많거나 개인적으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굳이 신고를 하지 않는 피해자 가족들도 많다고 한다. 또한 고령화한 납북자 가족들이 과거에 겪은 연좌제에 대한 악몽 때문에 신고를 꺼리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한다. 6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어도 납북자 가족들 중에는 6·25전쟁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납북으로 인한 피해를 신고한 사람이 3500여 명에 불과한 현실에서 6·25전쟁 납북자 수가 8만2959명에서 8만4532명으로 바뀐다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숫자의 변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들이 참전했던 전장(戰場)에서 조국의 이름 아래 죽어 간 군인의 유해를 단 한 명이라도 더 찾기 위해 애쓰는 미국의 노력은 진부하더라도 납북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시 한 번 더 경청해야 한다. 하물며 이 일은 산 채로 끌려간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일이고, 그 소식을 기다리는 수만 명의 국민이 이 땅에 엄존해 있는 일이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이었던 당시 기자는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발견 후 통일부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다음은 그때 그와 나눴던 문답이다.
—정부는 6·25 납북자 명단과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실향사민(失鄕私民) 명단 외에는.”
—1956년에 대한적십자사에서 납북자가족들의 신고를 받아서 작성한 실향사민 명단 외에는 없다는 말이죠? 주무 부서로서 행자부 등 다른 정부 기관에는 납북자 명단이 작성된 문건이 있는지 확인은 해보셨습니까.
“우리가 노력을 했고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서도 요구를 했지만 통계자료만 있고 실사자료가 없으니까 행자부에서 그걸 어떻게 해요. 생각을 해보세요. (있다면) 50년 전 전시(戰時)의 자료인데… 그 당시에는 자료 정리가 안 됐잖아요.”
—취재를 하다 보니까 6·25 납북자 가족들은 1952년도에 정부에서 납북자 명단을 작성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납북, 피살, 행방불명 이렇게 항목을 나눠서 조사해서 명단을 작성했다고 하던데요.
“내가 말씀드렸잖아요. 통계는 나와 있어요. 그 당시에 사망이 몇 명, 피랍이 몇 명, 실종이 몇 명 이런 식으로 당시 내무부에서 경찰에서 들어오는 이런 걸 통합해서 냈지 누가 납북자다, 누가 사망했다, 이런 게 없다는 겁니다.”
—통계로는 되어 있어도 일일이 개인별로 피해를 조사해 작성한 명단은 없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과연 그 공무원의 말대로 이승만 정부는 전쟁 상황이라 납북자 명단을 작성할 수 없었을까. 납북자 명단 발견 후 1년반쯤이 지난 2003년 7월 기자는 당시 공보처 통계국 소속 공무원으로 납북자 명단 작성에 참여했던 이원상(李元相)씨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기자와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84세였는데 현재는 작고했다. 이씨는 “명부를 어떻게 작성했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피란 당시 수도였던 부산의 경우는 우리가 직접 받았어요. 타 지방에서도 부산으로 직접 와서 신고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지방은 납치 일시, 장소, 직업 등을 적도록 한, 우리가 만든 양식을 행정계통을 통해 보내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납북자 가족들은 휴전협정이 체결되면 납북자들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면서 눈물바다를 이뤘죠. 심지어 명부가 인쇄돼 나오자 혹시라도 신고한 가족의 이름이 빠져 있을까 봐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통계국 사무실이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어요.”
6·25 당시 납북자 명단을 작성한 담당 공무원이 생존해 있었다는 것은 정부가 납북자 명단을 찾을 의지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는 또다른 방증이기도 하다.
현 정부의 공무원들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더 이상 명단을 찾을 수 없지만 노력하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답변이다.
과거 정부나, 지금 정부나
현재 정부가 확보하고 있는 납북자 관련 명부는 《서울시 피해자 명부》(2439명, 공보처 통계국 작성),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8만2959명, 공보처 통계국 작성), 《6·25동란으로 인한 피랍치자 명부》(1만7940명, 내무부 치안국 작성),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7034명, 공보처 통계국 작성) 등이다. 이 가운데 정부가 애초부터 보관하고 있었던 것은 7034명의 명단이 적힌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뿐이다.
나머지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와 《월간조선》이 찾아냈거나 고서(古書) 소장가로부터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이 개인 돈을 들여 구입한 것뿐이다. 이번에 발굴된 인천시와 경기도 양평군의 문서도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찾아낸 것들이다. 6·25전쟁 중 납북자와 관련한 자료를 찾는 일에는 과거 정부나 현재의 정부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셈이다.
그나마 지난 2010년 6·25 납북 피해자법이 통과됐고 현재는 국무총리실 산하에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작은 위안거리다. 진상규명위원회는 6·25전쟁 당시 납북으로 인한 피해 신고를 받고 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올 연말까지 피해자 신고를 받을 계획이지만 9월 말 현재 피해 신고를 한 사람은 3500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사망한 가족들이 많거나 개인적으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굳이 신고를 하지 않는 피해자 가족들도 많다고 한다. 또한 고령화한 납북자 가족들이 과거에 겪은 연좌제에 대한 악몽 때문에 신고를 꺼리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한다. 6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어도 납북자 가족들 중에는 6·25전쟁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납북으로 인한 피해를 신고한 사람이 3500여 명에 불과한 현실에서 6·25전쟁 납북자 수가 8만2959명에서 8만4532명으로 바뀐다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숫자의 변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들이 참전했던 전장(戰場)에서 조국의 이름 아래 죽어 간 군인의 유해를 단 한 명이라도 더 찾기 위해 애쓰는 미국의 노력은 진부하더라도 납북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시 한 번 더 경청해야 한다. 하물며 이 일은 산 채로 끌려간 사람들의 흔적을 찾는 일이고, 그 소식을 기다리는 수만 명의 국민이 이 땅에 엄존해 있는 일이다.
<월간조선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