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논단

북한의 관료정치와 경제개혁

하나님 사랑 2014. 9. 16. 13:30

북한의 관료정치와 경제개혁

북한의 행태에 대한 평가나 분석은 북한을 하나의 단일한 행위자처럼 의인화해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김일성/김정일의 의지가 그대로 체현되는 과정처럼 그려진다.

물론 유일영도체제를 확립하고 절대권력을 휘두른다는 점에서 김정일은 국내적으로 주변 어떤 나라의 지도자들보다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에 견주려면 오늘날의 지도자로는 어렵고 과거 스탈린, 마오쩌둥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지도자라고 해도 권력의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라면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좋은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성공적인 전제군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청나라의 옹정제가 절대왕정을 실천하려다가 겪은 한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옹정제가 독재정치를 하는 데 보다 큰 강적은 … 관료기구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옹정제가 기를 쓰며 애달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관료들은 걸핏하면 냉담한 눈으로 이를 방관하였고 툭하면 비판을 가하려 하였다. …

군주는 정치상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어떤 유력한 관료라도 말 한마디로 침묵시킬 수 있고 또 파멸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료 개개인에 한정된 것이지 관료계급 자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옹정제의 노력으로도 관료조직의 극히 일부분만을 겨우 뜻에 맞게 고칠 수 있었을 뿐 관료제도 그 자체는 엄연히 온존해 있었다. 이렇게 불사신의 비법을 지닌 관료계급 사이에서 인기를 잃는 것은 청조를 위하는 일이 아니다. 관료의 사욕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어 자본과의 결합을 허락함으로써 청조가 이들의 이익과 일체화되는 것이 청조를 영속시키고 만주인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것이다.[宮崎市定,2001:199,204]

즉 대신 하나를 짜르는 것은 식은죽 먹기지만 관료계급 전체를 전멸시키고 생판 다른 사람들로 대체한다든가 하는 식으로는 일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외교관을 짜르고 다른 외교관을 장관으로 임명한다거나, 어떤 장군을 짜르고 다른 장군을 임명하는 정도로는 그 나물의 그 밥에서 골라 뽑은 이상, 전체로서는 상당한 연속성이 남게 된다.

이런 문제들은 옹정제 뿐 아니라 고금의 많은 최고지도자들을 좌절케 한 바 있다. F.D.루즈벨트의 말을 들어보자.


재무부는 조직이 방대한데다 업무영역도 넓고 고유의 관행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이들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행동이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 그러나 재무부는 국무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직업외교관들의 생각이나 정책, 행동에 모종의 변화를 가져오려고 한번 시도해보라. 그러면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무부와 국무부를 합쳐도 그 ‘해~군’(海軍)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해~군’에서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마치 깃털 침대를 때리는 것과 같다. 오른 주먹으로 때리고, 왼 주먹으로 때리고, 녹초가 되도록 두들겨 패고 나서 돌아서면 때리기 전이나 다름없이 멀쩡한 그 빌어먹을 침대 말이다.[Allison&Zelikow,2005:227-8]

이런 상황에서 많은 최고지도자들은 정부 내의 여러 파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거나, 어떤 파벌에 힘을 실어줌으로서 무리수를 쓰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사실 국가의 의사결정에 이런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의견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그리고, 북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어느쪽이 득세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대외환경에 따라 강경, 온건이 득세하게 되죠. (lime)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의 행태를 분석할 때, 북한 내부를 블랙박스화 해서 단일 행위자처럼 다루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부 정책결정과정의 내면적 관점들을 전통적인 합리적 행위자 분석법과 종합해 유명해진 앨리슨의 설명을 들어보자.


제2모델[조직행태]과 제3모델[정부정치]에 따른 분석은 제1모델[합리적 행위자]의 분석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제1모델의 경우 한 전략분석가가 책상 앞에 앉아서 미국과 소련의 국가적 차원의 수익과 비용을 계산한다. 한 나라가 내린 가치극대화를 위한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리적인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분석능력이 필요하다. 조직의 역량과 산출을 강조하는 분석, 또는 개인간의 흥정에 초점을 둔 분석을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부 분석가(특히 게임에 직접 참가하는 경기자)들은 자기 나라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3모델을 이용하고 다른 나라의 행동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제1모델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자국의 경우 정보가 많고 타국의 경우 정보가 적기 때문인데 이는 곧 어느 설명을 택하는가는 정보수집의 비용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Allison&Zelikow,2005:469]

즉 우리 편 의사결정은 (나도 참여해서 내막을 잘 아니까) 관료조직들 간의 흥정 등의 방법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정작 적의 의사결정에 대한 견해를 말할 때는 (놈들의 내부 사정은 잘 모르니까 내부 사정을 몰라도 설명을 내놓을 수 있는) 합리적 행위자 모델로 돌아가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북한의 정책을 분석할 때 특히 중요하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운 나라들 중 하나이며, 정부 내부나 최고위층의 정책결정과정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북한의 내부에 대해 신뢰성 있는 정보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내부 세력들 간의 흥정과정에 대해서 다룰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싶어하는 주제에 대한 최근의 흥미로운 연구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기범의 박사학위논문인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이다.(사실 이 블로그의 최근 몇몇 포스팅에서 그 중 일부를 인용하여 소개한 적이 있기도 하다)

박사학위논문은 보통 젊은 연구자가 독립된 학자로서 내놓는 첫 작품인 만큼 그 의욕은 대단하더라도 수준이 꼭 높다고 장담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 경우는 좀 다르다. 한기범은 국정원 대북파트에서 20년 이상 근무하고 제3차장(대북담당)을 지낸 장년의 분석가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황장엽 등 고위급 탈북자들의 신원을 관리하고, 이들을 debriefing하여 정보를 수집한다. 아무래도 민간의 개별 연구자들보다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접근성, 시간, 자원 모든 면에서 유리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은 빈손으로 남한에 왔고, 자신이 알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바로 자신의 몸값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을 부풀리려는 경향이 있다. 관직에 몸담았던 탈북자의 경우는 더 그렇다. 게다가 외부와의 교류가 부족한 사회에서 성장한 관계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기능이 외부 사회 기준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경우도 심심치않게 발견된다. 따라서 이들의 증언 중 어떤 것이 얼마나 믿을만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한기범은 다른 사람들로서는 쉽게 도전하기 힘든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을 분석하는데 월등히 유리한 경력의 소유자라고 하겠다. 물론 이 논문은 공개된 자료들에 입각해 쓰여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국정원에서 쌓은 경험이 공개된 자료들 중 어떤 것이 얼마나 신뢰할 만하며 어떤 것을 논거로 선택할지를 평가하는데 사용되었다고 기대해볼 수 있다.


이 논문은 분량이 상당(350쪽)한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면 될 것 같고, 하여간 한기범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북한 내각이 2004년에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가 2005~2006년 사이에 저항에 직면해 개혁이 좌초되고, 그 후 퇴행이 진행된 것(2008)은 쉽게 말하면 당, 정부(내각), 군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1990년대 경제침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경제개혁’을 독려하였고, 개혁성과가 부진하자 뒤늦게 내각에 경제관리 권한을 확대해 주었으며, 시장경제 문제로 내각과 당이 갈등을 빚자 처음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은 당을 지지해 주었다. 그는 정책의 입구와 출구를 관리할 뿐 집행과정에서 제반 문제점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내각은 경제개혁을 주관하면서 처음부터 혁신적인 안을 내놓지 못하고 전형적인 ‘조직행태’를 보였다(2002-03). 권력기관의 눈치를 보면서 ‘과거 개혁경험’들을 짜깁기했고, 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표준행동절차’의 급조로 혼란을 초래했으며, 점증하는 일선 현상의 ‘본위주의’를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내각이 급진적인 시장 경제를 추진(2004)한 것은 개혁 부작용이 누적되어 조직 존립의 위기를 인식한 이후였으며, 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근본적 개혁 외에는 길이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시장경제로의 개혁은 정치문제로서 당의 영향력을 위축시키는 조치였다. 당은 내각간부의 비리를 조사하는 한편 김정일에게 그간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보고하여 개혁세력을 무력화시켰다(2005-06). 나아가 당은 김정일에게 ‘시장 = 비사회주의 서식장’으로 인식(2007)시켜 그의 개혁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경제개혁 전면 후퇴’ 선언(2008)을 유도하였다. 이처럼 내각은 ‘특수경제 축소’를 위해, 당은 내각의 ‘과잉 정치화’ 차단을 위해 경제개혁의 폭과 속도를 놓고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 ‘관료정치’가 전개되었다. 다만, 정책의 ‘흥정과 타협’이 지도자를 매개로 하여 거래된 것은 수평적 협조 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북한적 현상이었다.[한기범,2010:x]



여기서 북한의 정부구조를 잠깐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원래 전형적인 공산국가는 공산당이 정부와 군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감독하게 되어 있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은 키잡이, 정권기관은 노젓는 이"였다. 그러나 김정일이 정권을 물려받고 국방위원장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선군통치'를 펼치면서 이 구조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군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내각의 위상은 한 단계 더 밀려나게 된다. 내각은 원래도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조직이었으니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조치라 하겠다.


[그림 1] 북한의 권력구조 변화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인 박봉주 총리의 '개혁'은 김정일이 일시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고는 하나 총리가 담당하는 '내각', 즉 가장 힘이 없는 기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북한 경제는 몇 개의 차별화된 구획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이 널리 인정된다. 분류 가짓수는 학자에 따라 2~7개 정도로 다양한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여기서는 4단계 정도로만 나눠 보겠다. 이때 북한 총리는 북한 경제 전체를 담당하지 못하고 오직 내각 경제만 담당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북한 경제가 엉망진창인지라 산업의 가동률 또한 형편없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정받는 특권 경제 부문(당경제와 군수경제)은 가동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마련이다. 이들 뒤에는 당과 군이라는 힘 있는 기관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가 엉망진창인데, 희소한 자원과 우량기업소들을 특권경제 부문에 우선적으로 빼앗기고 빈 쭉정이들만 잔뜩 떠안다보니 일반 경제를 담당하는 내각으로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내각은 김정일의 관심을 얻었다는 것을 무기로 특권경제 부문의 축소를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김정일은 내각의 조치들 중 비교적 쉬운 것은 승인하면서도 특권경제를 정리하는 것만큼은 꺼렸다. 예를 들어 일찌기 7.1조치를 기획했던 '6.3 그루빠'의 경우에도 특권경제 축소를 상신하였으나 거부한 바 있다.[한기범,2010:112] 사실 김정일이 이들에게 제시한 지침은 “국방공업을 우선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라”는 것이었다. 즉 특권경제의 우선적 요구를 공인한 셈이다. 이는 이론화를 거쳐 이른바 ‘선군시대 경제건설 로선’으로 확립된다.[한기범,2010:149-50]


[박형중 외,2009:85-6]도 한기범과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다. 내각이 특권경제의 축소 문제를 놓고 기득권층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나누어 줄 수 있는 독점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역권이다. 소위 ‘와크’의 배분은 궁극적으로 김정일의 관할 사항이다.

북한에서 석탄수출 건은 내각과 군부 사이에 전통적 갈등대상 중의 하나였다. 내각은 난방 및 전력생산을 위해 석탄수출 중단을 주장해왔다. 군부는 석탄수출을 통한 외화획득을 군사비 충당의 중요 원천으로 간주해 왔다. 과거에는 석탄수출 권한이 내각, 당, 군부 등에 분산되어 있었다. … 과거 박봉주와 군부 간의 갈등 중의 하나도 석탄수출문제였다. 2005년경 박봉주는 수출 중단을 결정했고, 2006년 10월 핵 실험 이후 군부가 이를 번복했다.[박형중 외,2009:85,92]


결국 당/군의 특권경제와 내각의 한판 승부는 특권경제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당은 내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들의 재기 가능성까지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당과 군은 경제개혁 초기 7.1조치나 시장장려에 대해 방관자적 입장이었다. 이들 권력기관들로서는 내각의 조치로 별반 이해관계가 충돌될 것이 없었고 이권개입의 여지가 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박봉주가 총리로 등용되면서 그에 대한 지도자의 신임이 증대되자 당은 내각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해 왔다. 당은 내각이 시장경제를 추진하자 반격에 나섰다.(2005) 경제개혁과 당적지도 간의 조화문제를 제기하면서 경제관리에 대한 간섭을 확대하는 한편, 개혁정책의 문제점과 내각 간부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김정일은 총리를 신임은 하나 그의 지나친 개혁속도에 의구심을 가진 상태에서 당이 내각의 ‘실정’을 잇달아 보고하자 경제개혁에 대한 입장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당은 지도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내각의 경제정책 주도권을 회수하고 국가양곡전매제 실시, 개인 소상공업 금지 등 개혁속도를 조절하는 한편 내각을 집중 검열하여 개혁성향의 간부들을 퇴진시키고 박봉주 총리에 대한 직무정지를 유도해 냈다.(2006)

당은 경제정책 주도권을 회복하기 나서도, 경제개혁에 대한 지도자의 ‘도박사’와 같은 미련을 떨쳐버리기 위해 ‘돈벌이의 폐해’ 사건들을 부각시켰다.(2007) 당은 중국과의 ‘눅거리’(값싼) 상품 교역사건, ‘구호나무’ 벌목 밀매사건, 간부들의 시장장세 횡령사건 등을 ‘비사회주의 사건’으로 평가하고, 사회 전반에 돈벌이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가이익’은 안중에 없으며, 시장이 자본주의 서식장이 되고 있다고 지도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김정일은 적극적인 ‘시장통제’를 지시한데 이어, 경제 간부들이 ‘사상의 빈곤’에 빠져있다고 비판하면서 경제관리에 ‘사회주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할 것을 강조하였다.(2008) 당은 ‘돈벌이’를 정치 쟁점화하여 경제개혁 의제를 퇴장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2008년 하반기에 북한 경제관료들은 내각으로부터 일선 현장에 이르기까지 ‘사상투쟁’으로 분주했으며, 김정일의 와병(2008.8)으로 연기된 종합시장 단속, 뙈기밭 회수, 화폐개혁 등의 역개혁 조치들은 2009년에 강행되었다. 북한의 역사상 4번째로 시도되었던 ‘경제개혁 실험 10년’은 다시 원위치되었으며, 오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주체의 강화’ 전략에 의해 또다시 잠금장치가 채워졌다.[한기범,2010:314-5]



자 이제 앞서 살펴보았던 주장을 재검토해 보자.


그리고, 북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어느쪽이 득세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대외환경에 따라 강경, 온건이 득세하게 되죠. (lime)

북한 지도층 내부에 얼마간 입장이 다른 세력들이 존재하여 관료정치를 통해 '金心'을 움직여 정책을 수행해 나간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대외환경에 따라 어떤 파벌이 힘을 얻는가가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앞선 논의에서 우리는 2004-2005년 사이의 북한 박봉주 내각의 개혁 시도가, 미국 부시 행정부 1기에 터져나온 제2차 북핵위기나 중국관헌의 양빈 체포로 무산된 신의주 특구 등을 고려하면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이명박 때문에 중단되었다고 보기에는 거꾸로 이미 그 몇 년 전에 중단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즉 대외환경이란 원인은 개혁의 시작과 좌초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반면 [한기범,2010]이나 [박형중 외,2009]는 모두 북한 내부적 원인, 즉 '본위주의'(부처이기주의)나 당정군 사이의 밥그릇 싸움을 지목하여 이 문제를 보다 매끄럽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대외환경 요인 대신 북한의 내부정치적 요인을 지목하는 것이 훨씬 그럴듯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내각은 당의 관여가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당·군의 ‘특혜적’ 경제 사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경제를 관리해야 했고, 정치논리의 제약 하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내각이 주도하는 북한의 경제개혁은 이 같은 구조 속에서 추진되었다. 내각으로서는 한편으로는 기회였으나,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개혁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위기였다. 지도자가 ‘내각책임제’를 강조하였으나 경제개혁 초기에 다른 조직들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내각의 권한을 확대해 주지는 않았다. 내각은 내각의 산하 생산단위들에 대한 수직적 관리책임만을 의미할 뿐이다. 내각은 ‘경제관리개선 조치’로 계획경제에 시장기제를 부분적으로 보완하도록 허락받았으나 비대한 상부 경제관리구조를 돌파하는 것은 내각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지도자는 부하의 역량을 신장시켜 주거나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개선해 주지 않고 내각에 임무를 맡겼다가 뒤늦게 그 한계를 깨달았다. 만약 지도자가 국방위원회의 역할 강화와 버금가게 내각의 능력 신장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북한의 경제개혁 실험의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한기범,2010:55]



끝으로...


김정일은 궁극적으로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만, 그 결정에 대해 결코 책임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책결정은 해당 관련 기관이 김정일에게 제기하는 제의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의서가 실제 정책화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김정일이다. 그런데 유일사상 10대 원칙은 ‘수령의 무오류성’을 명기하고 있다. 그 정책이 성공하면, 그 공로는 그 정책이 실행되도록 허가한 김정일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만약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 제의서의 제안자가 정책실패의 책임을 지는 식의 구조이다. 제의서 체계는 의사형성과 결정, 그리고 책임의 과정을 왜곡한다. [박형중 외,2009:85-6]



참고

Allison, Graham T., Zelikow, Philip D., Essence of Decision: Explaining the Cuban Missile Crisis (2nd Ed.), New York:Longman, 1999 (김태현 역, 『결정의 엣센스』, 모음북스, 2005)
宮崎市定. 『雍正帝 : 中國の獨裁君主』. 東京: 岩波書店, 1950(1999)
(차혜원 역, 『옹정제』. 서울: 이산, 2001.)
박형중, 조한범, 장용석. 『북한 ‘변화’의 재평가와 대북정책 방향』. 서울: 통일연구원, 2009.
한기범.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경남대학교 , 2010년 2월



출처 : Sonnet님 이글루


링크를 통해 선군정치와 전통적 공산주의를 쉽게 구분할 수 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