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춘천 ,홍천지구 전투 육군소장 임부택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작성자 overmas2
" );0 | / | 2005.11.30 19:13 |
1919년 9월 24일 전라남도 나주에서 출생한 임부택 장군은 1938
년 2월 2일 칙령 제95호로 공포되고 4월 3일자로 시행된 ‘육군지원
병령’에 따라 일본군에 지원입대, 태릉의 지원병훈련소에서 교관으
로 군사교육을 담당하였다. 조국의 광복과 함께 1945년 12월 군사영
어학교가 개설되자 그는 채병덕 장군의 추천으로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고, 제1연대가 창설되는 과정에서 하사관 요원으로 선발되어
110001이라는 사병군번 1번을 받고 제1연대 제1중대 선임하사관으
로 연대편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946년 5월 국방경비사관학교
의 창설과 함께 제1기생으로 입교하여 2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6월
15일 군번 10117의 육군참위(소위)로 임관, 제1연대 1중대 소대장으
로 부임하였다.
이후 1948년 5월 제주지구전투사령부의 제1대대장으로 토벌에 참
가한 그는 다음해 5월 제7연대가 ‘강태무․표무원 월북사건’에 따른
제8연대의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춘천으로 이동할 무렵 제7연대의
부연대장으로 보임되었다. 그리고 5개월 후인 1950년 1월 연대장으
로 승진하여 38도선 경계임무에 진력하던 중 6.25전쟁의 발발과
함께 춘천,홍천지구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 춘천,홍천지구전투와 작전 활동
춘천,홍천지구전투는 중동부전선의 춘천과 홍천 북방에 배치되
어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2사단과
제7사단의 공격을 받고 춘천,어론리,현리,말고개 일대에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개전 당시의 춘천,홍천지구 전투상황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과 말고개의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이용하면서 6일 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 2개 사단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했으며, 이로 인해 북한군 제
2군단은 춘천,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전면적인 불법남침을 도발했을 당시
임부택 중령은 국군 제6사단 7연대장으로서 춘천 정면의 방어를 담
당하고 있었다. 1949년 12월 19일 제7연대장에 부임한 임부택 중령
은 부대 교육훈련과 38선 방어진지 구축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
었다. 이에 따라 제7연대는 북한군이 남침하기 이전에 대대전투훈련
을 완료하였으며, 당시 장교들이 기피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대부분
의 장교들을 보수교육인 고등군사반에 입교시켜 자질 향상에
주력하였다.
또한 춘천이 38도선에서 불과 13㎞ 남쪽에 위치한 사실을 감안하
여 처음에는 38선 주요 접근로에 토치카 및 유개호를 구축하고 기
성진지를 보수하였다. 그러나 48㎞의 광범위한 정면을 모두 지킨다
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춘천을 고수할 수 있는 주저항선의 진
지가 없음을 착안한 임부택 중령은 춘천 주민과 학도호국단의 지원
을 받아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변과 그 북쪽에 춘천 분지를 감제하
는 164고지 일대에 방어진지 구축작업을 시작, 개전 1개월 전인 5월
하순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1950년 6월 25일 04시경 38도선 전면에 걸쳐서 남침이 개시되어
북한군 제2사단과 제7사단은 국군 제6사단 7연대와 제2연대가 담당
하고 있던 춘천 북방과 인제 남방지역을 동시에 공격해왔다. 적 제2
사단은 제7연대 지역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일부 병력을 북한강
계곡으로 침투시켜 제7연대의 퇴로를 차단해 이를 춘천 북방에서
섬멸시키려 하였다.
이에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북한강 계곡의 제3대대와 소양강
북방의 제2대대에 각각 현 진지를 고수토록 지시하고 포병은 춘천
북방 산발리와 수리봉에 저지사격을 지향토록 지시하였다. 이후 통
신이 두절되자 자신이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소양강 건너 우
두산에 연대관측소를 추진하였으며, 예비인 제1대대를 북한강 계곡
에 투입하였다.
이러한 연대장의 효과적인 지휘로 제7연대는 병력과 장비의 열세
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
면서 진지를 고수하였으며, 포병은 화력을 집중하여 남진하는 적에
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6월 25일 14시경 춘천 북방 옥산포에서 방어하고 있던 제7
연대 57㎜ 대전차포 제2소대장 심일(沈鎰) 소위는 57㎜ 대전차포로
서는 적의 전차나 자주포를 파괴할 수 없음을 알고 특공조를 조직
하여 화염병과 수류탄으로 SU-76 자주포 2대를 파괴함으로써 뒤따
르던 8대를 북쪽으로 도주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제7연대 장병들의 피나는 저항으로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제7연대 장병의 용전
분투로 적 제2사단의 춘천공격이 부진하자 적 제2군단장은 제7사단
주력을 인제 방면으로 전환하여 소양강 북안을 따라 춘천의 동측방
공격에 가담시키려 했으며, 적 제2사단의 진출이 지연될 경우 북한
군 작전계획 전반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춘천 점령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한편 국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6월 27일 원진나루터에서 제
7연대 2대대가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양강
남안에서 제7연대가 주진지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제6사단의 퇴
로를 위협하는 홍천의 확보를 위해 예비대인 제19연대와 포병의 주
력을 홍천으로 전환하였다.
6월 27일 적은 제7사단 병력으로 증강된 제2사단을 투입하여 춘
천 탈취를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제7연대는 병력이 부족
한 상태에서도 선전분투했으나 더 이상 전선유지가 불가능하자 육
본의 전선조정 명령에 따라 춘천 남쪽 원창고개에 제2대대를 배치
하여 철수를 엄호토록 하고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원창고개는 종격
실의 고지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제7연대 2대대는 6월 28일 오후 적 2개 연대 병력의 침공을 격퇴하
였으나 6월 29일 결국 고개를 포기하고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는 6.25전쟁의 승패결정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북한군 제2군단은 서울 공격의 조
공부대로서, 6월 25일 당일에 춘천을 점령하고 즉각 수원 방면으로
돌진시켜 서울 방어를 위해 집중될 국군의 증원부대를 차단함과 동
시에 한강 이북의 아군을 포위,섬멸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만일 적의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유엔군이 참전하기 이전에 부산을
점령당할 확률이 높았다. 제7연대의 성공적인 방어는 수도권에 집중
적으로 투입된 국군 주력부대로 하여금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여 한
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데 결정적인 공헌
을 하였다.
그후 제7연대는 전선의 균형유지를 위해 축차 지연전에 들어가
음성 북방의 동락리에서 이천-장호원-충주 축선을 따라 남진중인
적 제15사단 48연대를 기습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격퇴함으
로써 개전 이래 가장 통쾌한 국군의 승리를 가져왔으며, 부대원 전
원이 일계급 특진하는 유례가 드문 대승을 기록하였다. 또한 이 전
투는 전술적으로도 진천-음성-진천으로 이어지는 저지선을 형성, 아
군의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음성
동락리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제7연대는 괴산-연풍-조령-옥녀
봉 등지에서 지연전을 전개하고 아울러 문경-점촌을 거쳐 함창에
서 적에게 타격을 가한 후 신령에서 최후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저지하였다.
이후 9월 15일부터 반격에 나선 제7연대는 군위-의성-안동-점촌을
수복하고 문경․충주․원주를 탈환하며 북진을 계속하여 10월4일에는
화천을 점령하였다. 이어 평강을 탈환한 연대는 험준한 낭림산맥을
이용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섬멸하고 성천-순천-개천-희천을
점령하는 등 북진을 거듭하였다. 초산지구를 점령하라는 유엔군사령부의
명령을 하달받은 연대는 풍장과 고장을 거쳐 10월26일 초산의 압록강변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급변하여 사단으로부터 철수명
령을 받은 제7연대는 10월 30일 압록강을 뒤로 하고 철수의 길에
올라 38도선 이남의 경기도 광주-여주선까지 후퇴하였다. 1951년 4
월 제6사단 부사단장으로 명령을 받은 임부택 대령은 사창리전투에
서 중공군 2개 사단의 공세로 인해 용문산까지 후퇴하여 방어
선을 구축하였다.
제2차 춘계공세를 통해 가평을 점령한 중공군 제63군 예하의 3개
사단은 제3차 춘계공세를 개시하여 제6사단을 공격해왔다. 전 화력을
총동원한 협조된 탄막과 항공지원, 역습 등으로 적을 격멸하고 반격
을 개시한 제6사단은 3,500여 명의 포로와 2만 명 이상의 적을 사살
하는 전과를 거두고 사창리전투에서의 실추된 명예를 되살렸다.
1951년 11월 제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된 그는 공방전이 치열했던
동부전선의 351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마침내 1952년 8월
육군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제1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중부전선으
로 이동한 제11사단은 1953년 7월 일명 ‘휴전전투’라 일컫는 삼현
지구전투에 임하여 맹렬한 적의 7월 대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휴전을 맞았다.
□ 전후 활동과 인물 단평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국방부 인사국장, 육군본부 병참감, 제1군
단장 등을 역임한 임부택 장군은 6.25전쟁 3년 동안의 기간 중 육
군보병학교 부교장으로 있던 3개월을 제외하고는 전 기간을 연대장,
부사단장, 사단장으로서 전장을 누빈 몇 안 되는 장군이었다. 또한
장군은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彭德懷)가 수십만의 중공군을 지원
군으로 투입하면서 “임부택을 사로잡거나 제7연대를 없애버려라”고
특별지시를 내릴 정도로 탁월한 지휘력과 용맹성을 발휘, 두 차례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6.25전쟁의 명장이었다.
1962년 3월 육군소장으로 전역한 장군은 국영기업의 경영자로 국
가에 공헌하는 한편 ‘한국전쟁참전군인연맹’ 회장에 피선되어 참전
군인의 명예를 선양하고 권익을 신장하는데 노력하였다. 2001년 11
월 13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한 장군의 유해는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144에 안장되어 있다.
출처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영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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