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논단

박정희정권의 공과

하나님 사랑 2015. 6. 9. 15:14

우리의 근대 정치 역사 중 가장 긴 재임기간을 가졌던 박정희(1961년 5월 16일 ~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의 평가는 아직도 논란 속에 있다. 그렇기에 박정희정권을 평가하기 위해 다가가는 것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평가를 무시하고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 교과서(교육인적자원부 2003년 판)를 바탕으로 해서 나만의 시선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해보고자 한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 경제적 정책 들은 항상 동시에 공과(功過)를 수반했다. 즉, 모든 정책들이 뚜렷하게 양면적인 결과를 초래했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러한 정책들을 유신정권(72년) 전과 후를 기점으로 정치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으로 나누어 설명하려 한다.

  1961년 박정희는 5.16군사 정변을 일으키고 국가제건 최고회의를 만들어 반공국시를 내걸고 민정 이양을 약속했다. 군사 정부기간 동안 민주 공화당을 만들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 개정을 하였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됨으로써 1963년 제 3공화국이 시작 되었다. 유신정권 이전 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정치 정책은 1965년 한일협정의 비준과 베트남파병이었다. 1962년 한일회담이 벌어질 당시 국민들은 정부가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얻어낼 줄 알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사죄보다는 차관을 비롯한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더 먼저였다. 이에 당시 많은 학생과 시민은 ‘굴욕적인 대일 외교’라고 비판하며 시위를 벌였지만 결국 1965년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비상계엄과 휴교로써 막히고 회담은 비준되었다. 물론 경제개발 자금 확보가 중요한 것은 알지만 충분한 일본의 사죄를 얻어내지 않은 채 협정을 비준 시킨 것은 박정희 정부의 큰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경제개발 자금 확보를 위한 또 다른 정책으로 베트남 파병을 들 수 있다. 명분은 6.25당시 우방이 우리를 지켜준 데 대한 보답이라지만 실은 경제개발 자금 확보에 있었다. 당시의 베트남 파병은 베트남에는 라이따이한이, 우리 군인들에게는 고엽제라는 상처의 흔적을 남겼다.

  정치적인 실책을 범하면서까지 경제개발 확보에 나선 박정희 정부의 경제 정책은 실로 그 성과가 대단했다. 군부 정권 시절 제 1경제 개발 5개년부터 시작해 1965년 식량 증산 7년 계획,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새마을 운동의 시작은 전후 경제 발달의 초석(礎石)이 되었기 때문이다.

  1969년의 3선 개헌은 그의 가장 큰 정치적 과오이자 독재의 시작 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1972년 10월 모든 권력을 대통령에게 집중시키는 1인 독재 체제의 유신헌법이 발표됐다. 당시의 대외적 정세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세계 경제는 불황 속에 있었다. 당시 국내의 경제 발전도 주춤하였기 때문에 강압적인 통치 방식인 유신 체제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기점으로 영구적으로 완벽한 독재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반발하는 집단은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국내의 반발 세력을 완벽히 말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독재에 대해 미국과 일본 등 대외 정세가 점차 등을 돌리고 1970년 대 말, 제 2차 석유 파동 등으로 경제마저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거세졌다. 결국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창원 등지에서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대규모적인 학생 시위가 일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박정희대통령이 피격 당하면서 제 3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1971년도부터 박정희 정권은 통일 정책의 일환으로 1971년 남북 적십자회의,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휴전 이후 냉전 체제아래서 살얼음 같았던 남북 관계가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남북 대화를 자신들의 체제 강화에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공동 성명에 대한 남북한 사이의 해석 차이로 남북 대화는 더 이상 진전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훗 날 남북관계 개선의 앞길을 터줬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 한다.

  박정희 정부의 제 3공화국 시기 경제 정책은 외국에서 자본을 끌어 들여 무조건 적으로 산업을 개발하고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는 한일협상이니 베트남 파병이니 를 통해 유무상 차관을 도입하고 값싼 노동력을 중심으로 소비재 수출산업인 경공업 중심의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1962년 한국의 눈부셨던 경제 발전 속도는 1960년대 말기쯤에 이르러 위기를 맞이하였다.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부진에 빠졌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 들어서 중화학 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분별한 중화학 공업 투자로 인해 우리 농수산업은 더욱 침체 되었고 공해 문제를 가져왔다. 1970년대 말 전 세계적으로 오일 쇼크가 일어났지만 중동에 진출한 우리 젊은이 들이 벌어들인 달러로 적자폭을 메울 수 있었기 때문에 웬만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일어난 두 번째 석유파동은 1차 석유 파동 이 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중화학 공업에 대해 지나친 투자를 했기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제를 다시 어렵게 만들었다. 

  총 정리를 하자면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큰 공(功)은 역시 경제개발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개발에도 불구하고 첫 째 자금 확보 과정에서 한일 간의 청산 문제 등 많은 비판이 따르고 있고, 둘째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과오(過誤)를 저질렀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에게서 긍정과 더불어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과서를 보고 간단히 정리해 봤습니다]

<정치>

1961 5.16군사정변 국가제건최고회의-반공국시, 민정이양약속

        단원제 박정희 1963~ 1979(피격)

1965 한일협정 비준

        국군 베트남 파병

1969  3선개헌

1972  10월 유신 - 유신정권, 권위주의 체제 (8대 대통령선거,취임)

 

<경제>

1962  제1차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5  식량 증산 7개년 계획

1970  경부고속 국도 준공

         새마을 운동

1974  지하철 1호선 개통